감동뉴스

72세 할머니, 검정고시 합격기

그루터기 나무 2007. 8. 23. 10:33

 

졸업식장에서 흘리는 만학도들의 뜨거운 그러나 감격의 눈물.

 

 

요즘 거짓 학력으로 오랫동안 살아 온 사람들에 대해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그러한 위선보다는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과 진짜 실력을 키우기 위해 이 더운 날에도 양원주부학교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할 기회를 놓친 40~60대 주부들이 어느덧 학부모가 되어서야 그동안 못 배운 한도 풀고 서러움도 달래면서 초등과정, 중등과정, 고등과정을 마치고 다 늦은 나이에 영광의 졸업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생 중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리쌀을 반 공기씩 몰래 숨겨 놓았다 팔려다가 할머니에게 들통이 난 어린 시절의 가난을 잊을 수 없다는 고종우(57세),고종련(63세)자매, 친구들이 수학여행 버스를 타고 떠날 때 새끼줄과 갈퀴를 매고 산으로 가 나무를 해야 했던 순간을 죽는 날까지 잊을 수가 없어 뒤늦은 공부를 시작했다는 조회숙(48세) 학생,


장애인 딸과 함께 시작한 양원에서의 공부는, 모녀를 우울증에서 구해 낸 특효약이라며 활짝 웃는 이옥자(54세), 한선희(28세) 모녀 등 실로 쉽게 상상되지 않는 삶을 살아 온 평범한 삶의 주인공인 이 땅의 아줌마들이 소박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졸업의 문 앞에 선 것입니다.


오는 8월 28일(화) 오전 10시 서울 서부교육청 강당(5층)에서 양원주부학교 326명 학생들이 꿈에 그리던 소중한 졸업식을 하게 됩니다.


이번 졸업식을 맞이해 양원주부학교측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만학도들의 사연,수기를 제게 보내왔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만학도들의 사연을 많은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만학도의 꿈을 꾸고 있는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는 양원주부학교 관계자의 멘트가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그 눈물나는 수기 몇편을 차례대로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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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우 : 57세.


         보리쌀 한 공기씩 몰래 모으며 등록금을 준비했던 날들

  나는 충남 청양의 농가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이라 부모님께서는 위로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의 진학을 걱정하시며 나의 중학 진학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만류하셨다.

  이미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우리 집 가사 일을 전담하던 큰언니는 언제나 부엌일이며 잿물 빨래 등 그 많은 가사 일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불만이 가득했다. 나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석으로 교복을 단정히 입고 가방 들고 학교 가는 친구만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곤 하던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이 왔다. 선생님께서는 근교에 고등공민학교가 중학교로 인가되며 학생을 추가 모집하는데 입학금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었다. 아 ~이제 내 뜻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입학금이 무서운 게 아니라 3년 등록금이 부담이다.” 라는 것이다.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인 오빠는 내 손을 잡고 “내가 장학금을 타든 용돈을 주든 책임질 테니 부모님께는 학교에서 등록금도 면제 받게 되는 근로 장학생(교무실 심부름)이라고 말씀드리자”는 것이었다.

  그 때 오빠의 말이 고맙기 그지없었고 나에게는 구세주 같았다. 나는 근로 장학생으로 무조건 입학부터 하고 봤다.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고 꿈 많은 문학소녀가 되었다. 2학년이 되면서 오빠가 주는 등록금 시기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오빠는 힘겨워 하곤 했다.

  그 해 여름방학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방학 40일 저녁끼니를 굶기로 다짐하고 부모님께는 때마다 핑계를 대면서 보리쌀 반 공기씩 모으길 시작했다. 보리쌀 대두 한 말이면 1기분 등록금이 해결될 것이다. 모으는 재미로 배고픔도 몰랐다. 그런데 한 달쯤 되어 할머니께서 보리쌀의 정체를 아시고 노발대발 “도둑년을 집에서 키우고 있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공부하는 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책을 사려고 했다.“고 용서를 받고 잘 해결이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내 얼굴을 찬찬히 보시더니 “고종우! 너 방학 동안에 어디 아팠니? 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꿀꺽 삼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네 일기장을 보고 알았다.” 며 ”등록금 걱정을 하지 말고 훌륭한 오빠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다. 선생님의 많은 배려로 중학교 생활을 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3학년이 되자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셨다. 그 후 나는 번번이 등록금 미납자가 되어 시험 때가 되면 운동장을 돌기도 했고 시험 보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때는 일찍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기도 했으나 절대로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많았지만 어렵게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졸업식 날!!

중학교 졸업식이 내 생애 의미 있는  날이라고 생각되어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그런데 행사장에 고개를 밀어 넣었으나 낯설은 얼굴들만 보이고 선생님 뵙는 것도 용기가 나지 않아 뒷자리에 앉았다. 담임선생님은 더듬거리며 내 이름을 호명하셨고 안타까이 바라보시며 “고종우!! 밀린 수업료를 가져오면 졸업장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상 타는 친구들이 저 멀리 있었고 부모님과 함께하는 친구들이 낯설었으며 이런 저런 심경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났다.

울적한 얼굴로 교실 밖으로 나오니 운동장 모퉁이에 오빠가 기다리며 점심 사 주겠다고 달래주던 생각이 난다.


작년에 모교에서 초청장이 왔다. 동문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공로패를 준다는 것이다.

‘졸업장도 제 때 받지 못한 일을 되새기며  그때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했었더라면 이럴 때 자랑스러웠을 텐데..후회가 되었다.

그 때 다짐을 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작하자.. 가슴 한 구석 숨겼던 아픈 맘을 활짝 열어 가족에게 보였다. 남편도 아이들도 놀라며 적극 돕겠다고 위로를 하였다.

대학생 아들이 영어를 가르쳐주고 딸이 설거지를  해주고 아침마다 남편이 차로 등교를 시키고 가족 모두 응원하는 가운데 오늘도 녹 슬은 머리를 하나하나 닦으며 지식의 양식을 주워 담고 있다.

나는 양원주부학교 중등부에서, 언니는 전문부에서 우리 자매는 나란히 졸업장을 받는다. 과연 그 눈물을 어떻게 다 담아낼 지 환희에 찬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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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복 : 49세

기적같이 남편을 살려내고 시작한 공부


   일생에 한번만 와도 힘들다는 중풍을 남편은 3년 주기로 4번씩이나 쓰러졌다. 아이들은 중, 고생. 사업은 남자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 어떤 것 하나도 쉬운 일이 없었다. 자녀들을 돌보면서 남자의 일을 하면서 공장식구들의 의식주까지 해결해주어야 하는 일, 내 한 몸으로 져야 될 짐이 너무나 버거웠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짐을 지기로 했다. 그 어느 것도 포기하면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사업장을 소홀히 한다면, 당장의 의식주가 위태롭게 될 것 같고 남편을 치료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다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남편이 마지막 쓰러졌을 때의 상황은 병원에서 퇴원할 때 휠체어를 타고 퇴원했기에 실내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도 하기 힘든 그런 상태였다. 의사도 나에게 부질없이 밖에 나가서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혈압약이나 꾸준히 챙겨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프지 않았다면 마음고생은 덜했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남편의 건강상태는 경제적인 활동은 못하지만 비록 왼쪽 발에는 보조기를 착용하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남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해보여도 나는 그 병을 알기에 이정도 회복된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남편의 질병 때문에 나는 여자이기를 포기했다. 남편의 병간호를 하면서 나의 지식적인 면이 너무 부족함을 느껴 나는 때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대체 의학을 남편에게 시도해 보았더니 기적처럼 남편의 건강이 좋아져 앞으로 대체 의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 나에겐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행운을 얻게 됐다. 전국 생활 수기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한 일이다. 남편의 간병이야기를 써서 상을 받았으니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남편으로 인해 기쁨도 얻었다. 여기까지의 삶은 나 자신을 버리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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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숙 : 48세        

            수학여행  대신 새끼줄과 갈퀴를 챙겨 매고


       

나는 가난한 농가에서 위로 오빠 한분을 두고 딸이 여섯인 딸 부잣집 맏이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한 그때는 끼니도 제대로 해결 못한 집이 많았었고 우리 집도 예외 없이 고구마와 무밥으로 끼니를 이어 갔다. 나의 도시락은 늘 누런 고구마 밥과 꽁보리밥. 친구들이 새 하얀 쌀밥에 멸치 반찬과 계란 프라이 덮어 오는걸 보면 나는 반찬 뚜껑을 열 수 없었다.

  땅 한 평도 없는 가난한 농가. 남의 땅 부쳐 먹을 것도 없어 부모님께서는 날마다 허리띠 졸라매며 황무지를 개간하러 가시고 딸 부잣집 맏이인 저로써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동생들 돌보고 집안일을 맡아서 하기에도 바빴다.

  초등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꿈에 부푼 수학여행 날. 모두들 여행의 설렘에 잠 못 이룰 때에 나는 아쉬움과 부러움에 밤잠을 설쳤다. 이른 아침 친구들은 여행 가방을 둘러메고 들뜬 마음으로 등교할 때 나는 여행 가방대신 새끼줄과  갈퀴를 챙겨 맸고 친구들이 버스에 몸을 싣고 수학여행지로 떠날 때, 나는 터덜터덜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하며 저 멀리 보이는 신작로에 수학여행 가는 버스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가난의 찌든 삶의 현실에 눈물만 삼켜야 했다.

  졸업을 하고 다른 친구들은 하얀 칼라에 까만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멋진 가방을 들고 부풀은 상급학교 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내 나이 열세 살 때 생전 처음으로 부모님의 곁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부산에서 교복대신 제복을 입고 흔히들 말하는 공순이 생활을 시작 했다.

  내가 다시 태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양 갈래 곱게 땋은 머리, 하얀 칼라에 검은 교복 단정히 입고 한쪽 손에 책을 가득 넣은 책가방을 들고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까르르 웃는다는 사춘기 여고시절을 꼭 한번 보내 보고 싶다. 그런 소망이 이제야 진정으로 이루어졌음을 안다. 내 나이 마흔 여덟에 말이다.

   또한 문학소녀의 꿈도 문예반에서 이루고 있다. 백일장 대회에서 상도 받고 시낭송 공부에도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내 꿈이 무럭무럭 커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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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숙 : 65세

내 꿈의 날개를 활짝 펼쳐 보련다.


  나는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손이 귀한 집이라서 남존여비 사상이 매우 심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려고 하니까 할머니께서 여자는 많이 배우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상급학교를 가면 연애질만 하여 집안 망신이 된다고 하셨다. 대신 서당에 가서 한문공부나 하고 네 어머니한테 신부수업이나 잘 받아서 시집이나 가라고 하시면서 상급학교 진학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학교 선생님도 되고 싶고, 외교관도 되고 싶고, 여류비행사도 되고 싶고, 네거리 로터리 깡통위에 서서 교통정리도 해보고 싶고, 경찰총수도 되어보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는데.. 내 인생의 모든 것은 다 끝나버렸다.

부모님 말씀대로 서당엘 얼마간 다니는데 내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고 내 혀는 소나무 껍질처럼 굳어온 것 같았다. 여학생들만 보면 하얀 칼라 단정한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많이 울기도 한 그때. 마음의 큰 상처로 나는 병들어갔다. 

아버지는 문중 일, 향교장 일을 오래 맡아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늘 호롱불 밑에서 할머니께 책을 읽어 드리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사람 얼굴은 보지도 않고 대학생이란 말만 듣고 시집을 와서 열심히 살았다. 나는 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에 14년 간 다니면서 성악도 배우고 영어와 일본어도 공부했다. 그림도 공부하고 교양과목을 몇 과목 선택해서 배워도 봤지만 학력 난에는 늘 벗어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한테 양원주부학교를 알게 되었고 바로 등록을 하였다. 학교생활은 내게 행복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만나면 반가운 친구들이 많아서 좋고 여러 선생님이 좋고 그리고 학교 분위기가 너무나 좋다. 얼마 전 아흔이 다 되신 친정어머니께서 학용품을 사 쓰라고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못 가르친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나도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께서 흘리시는 눈물을 보며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모습을 살아 생전에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지난 4월 대검(고등학교 졸업학력검정고시)에 합격을 하였다. 이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의 문을 두드려 사업가로 전문가로 교육자로 내 꿈의 날개를 활짝 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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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재임 : 56세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인 공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나의 고향은 아주 깊은 산골이어서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교육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가난을 물려주었다.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여 엄청난 빚까지 남겨 주고 떠나셨다. 나는 이런 가난한 생활이 너무 싫어서 일찍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았다. 한글을 몰라서 직장에 가면 무시당하기 일쑤인 나의 고달픈 생활은 시작되었다. 자식들 3남매 가르치다 보니 내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진지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어머니가 공부할 차례가 되었다고 하면서 서울 마포에 있는 양원주부학교에 손 붙잡고 와서 등록을 시켜 주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내가 진짜 할 수 있을지 많이 걱정도 되었다.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할까 싶었는데 학교에 와서 보니 친구들도 많고 학교생활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나눠 먹는 음식들,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즐겁다.

  그러다가 올해 5월 중검 검정고시에 응시했다. “마음 급하게 먹지 마시고 구경삼아 한번 보고 오세요.” 하던 선생님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합격하게 되었다.   교장선생님께서 합격증을 나눠 주셨는데 어찌나 마음이 찡하고 울컥하던지 과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서는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답답함이 많았는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니 조금은 숨통이 뚫린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식구들이, 특히 아들이 너무도 좋아해줬다. 이제는 세상이 어느 정도 보이고 있다. 선생님들께서 강의를 하시는 순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죄송한 마음뿐이다.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는 더욱 더 노력하는 학생이 될 것이다. 한자 한자 안다는 게 너무나 재미있다. 이 세상의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다. 공부는 내 생애에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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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순 : 57세

내 마음의 위로가 된 배움의 길


  남편과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아오면서도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는데 큰 아이가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내 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하던 일도 접고 아들을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뭐든지 하였다. 그러느라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고 지칠 대로 지쳐 갔지만 그래도 나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부여잡았었다. 우리 아들만 살려 낼 수 있다면 나의 목숨도 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내게 이런 힘든 일들이 다가오는 것일까, 나는 하늘을 원망했다. 원망하다가 다시 기도했다. 그리고 나의 기도를 꼭 들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무심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들의 관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아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나마저 잃어버리겠다고 나를 진정시키기에 모두 안절부절 했다. 아들이 그렇게 떠나고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렇게 힘든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남편과 다른 아이들을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고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견뎌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은 남편까지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또 다시 삶의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멍하니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막내아들이 양원주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떠밀리다 시피 다녔었는데 점차 내게는 의욕과 활기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도 중퇴하고 한글도 제대로 몰랐던 내가 한문과 영어도 배우고 어려운 수학도 배우면서 점차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는 중검에 합격을 하여서 이제는 나름대로 꿈도 생겼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가게 된다면 사회 복지학을 전공해서 우리 아들처럼 암 환자들에게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꼭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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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자 : 54세

엄마와 딸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

 

  어려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일을 하다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고 3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결혼하면서부터 같이 살기 시작한 시댁 식구들은 어린 나에게는 많이 힘이 들었다. 외국에서 오랜 시간 일하고 온 남편은 가족 부양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아 내가 일을 해야 했다.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고생을 했다. 작은 트럭을 사서 시작한 장사로 일 년 뒤에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산후조리 일을 도우며 경제를 도왔다.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았는데 딸아이는 장애인의 기준으로 보면 인지력이 높고 비장애인으로 볼 때는 인지력이 다소 낮은 편이다.  딸아이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은 시켰으나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늘 주눅이 들어 있고, 졸업 후에는 집에만 있게 했더니 인터넷에 빠져 살았다. 그때는 인터넷을 사용하면 하는 대로 전화비가 올라갔다. 한 달에 몇 십만 원씩 나오는 전화비를 아깝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딸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도 덩달아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던 중 양원주부학교를 알게 되어 나 자신의 공부 뿐 아니라 딸아이를 위해  함께 등록을 했다.

  그렇게 원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양원에서의 공부는 내게는 그 동안 내 안에 늘 숨겨져 담아왔던 공부에 대한 응어리를 풀어내는 귀한 시간이 되어 주었고, 걱정했던 딸아이도 적응을 잘 하며 나를 따라 오고 있다. 집에만 있던 딸아이에게 양원 생활은 자신감을 갖게 했고 많이 밝아지게 했다. 딸은 자신만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활하다 보니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도 세상에 날개를 펴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자체로 나는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에게는 여기 양원 생활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갖고 아이가 다닐 수 있는 직업학교를 찾아 보낼 생각이다. 양원 생활을 시작한 후 일을 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경제적으로 힘이 들지만 나날이 늘어만 가는 나의 실력과 좋아지는 딸아이를 보며 조금 더 큰 희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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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정례 : 72세

거침없는 72세 노익장의 검정고시 합격기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나는 해방이 되던 이듬해 11살의 늦은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공부 외에 연극이나 노래에도 소질이 있던 나는 주위 친구들로부터 많은 시샘도 받았지만 부모님은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뭘 하느냐?”고 하시며 중학교 진학을 만류하셨다. 나는 울며불며 떼를 써서 “중학교 시험이라도 한 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서산여중’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합격자 발표를 보니 내 이름은 7등으로 합격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평생 농사일만 하신 분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이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셨고 결국 합격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로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어느덧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그때 이웃에 사는 분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조선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잘생긴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 당시로는 드물게 연애를 하여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남편은 정치를 한답시고 밖으로만 나돌고 가정에는 무관심했다.

  나는 남편을 대신해서 2남 4녀를 데리고 살림을 꾸려나가려니 안 해 본 일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우유배달도 하고 화장품 외판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을 모르고 점점 커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원주부학교를 알게 되었고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즐거움은 이제껏 겪었던 온갖 고생을 다 잊게 했다. 남들보다 50년 이상이나 늦었지만 오랜 숙원이었던 중학교 공부를 일흔 살이 되어 하게 되었다.

  2006년 5월에 중검(초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 그해 8월에 고검(중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을 보게 되었는데 서울시 최고령 합격이라는 영광을 거머쥐게 되었다. 올해 4월, 대검(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 그야말로 거침없는 합격의 질주였다. 공무원인 사위가 직장에서 “72세이신 우리 장모님이 초․중․고 과정을 1년 만에 합격을 했다”고 자랑을 했더니 직원들이 “젊은 사람도 합격하기 어려운 검정고시를 합격한 것을 축하 한다”고 금 목걸이 1냥과 쌍가락지를 보내왔다.

  이제 나의 목표는 대학진학이다. 대학에 가게 되면 사회 복지학을 공부하고 싶다. 그래서 나도 나이가 많지만 나이 많은 노인들을 전문적으로 보살피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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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 45세


열여섯에 야반도주하며 꾸었던 꿈


  초등학교 6학년 때인 무더운 여름날. 사랑하는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으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누가 학교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냥 학교에 못 갈 것이라는 혼자 생각에 평생 후회하며 살아 갈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졸업식도 하지 않은 채 대구에 있는 손수건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 다음해에 야학을 보내준다는 친척분의 말씀에 공장을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와 의상실에서 대가도 없이 3년이나 일을 했지만 그 친척은 나를 학교에 보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해서 친구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공부하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채 살림을 시작하였다.

  남편과 난 열심히 일을 해서 남보다 빨리 내 집 마련도 하고, 딸 둘을 키우면서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았지만, 난 늘 빛이 없는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아이들이 커 가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난 자꾸 사람들을 피하고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학부모가 되어서도 학교일에 참여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배우지 못한 것이 걸림돌이 되어 항상 나를 가로 막고 있었다.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있으면서도 사는 게 바쁘다보니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살아오던 어느 날, 우연인지 필연인지 양원주부학교를 만나게 되었다.

  2006년 3월 학교에 입학을 해서 그 해에 고검에 합격하고,  2007년 4월에 대검시험에도 응시를 하게 된다. 학교에 입학 한 지 9개월 만에 한자 1급 시험에 합격을 하였고, 사자성어 네 단계과정을 합격 하였다.

  공부를 하면서도 어렸을 때의 꿈인 성악가가 되고 싶은 열망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노래자랑 대회가 있으면 참가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작년에는 공덕1동에서 주최하는 노래자랑에 참가해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앞으로 대학에도 진학 할 계획이이다. 대학엘 진학한다면 음대에 가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