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세상

어느 할머니의 허름한 좌판

그루터기 나무 2007. 6. 15. 17:33

아파트 상가 옆에서 좌판을 펼치고 이것저것 야채를 파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시한수 적어봤습니다.

 

 

노년의 좌판

윤태

밤샘 근무를 마친 쥐들이 서둘러 퇴근할 쯤이면
우멍한 삼십촉 백열등의 한허리에
낡은 그림자 등에 업은 노파가
덜그럭 덜그럭 좌판을 펼치고
먼저 낡은 그림자를 내려놓은 후
얼마 남지 않은 生을 좌판에 늘어놓는다
주름진 호박 말랭이나
다닥다닥 엮은 고구마 넌출은
초로와 같은 삶의 파노라마
허투루 부르지 않는 生의 엘레지이다
실그러진 좌판은 생생한 무대이고
위에 깔린 것들은 남겨진 삶의 조각품이다
막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조각품들은 치워지지 않는다
다만 가리워질뿐이다
내일의 조촐한 무대를 위해
오늘도 얼기설기 널브러져있는
生의 조각품들을 폼나게 다듬는다
나풀나풀 춤을 추는 치마 뒷자락에
설핏하게 기운 다대 자국이 아름답다
구멍 뚫린 노년의 포장막 사이로
어슷한 저녁별 하나 내려앉으면
하루 분량의 줄어든 生의 잔재를
쓸어 내리며 좌판을 접는다
낡은 그림자와 함께 저벅저벅
집으로 가는 길이 벅차다

근무 취침에서 깨어
말간 쥐들의 눈에
生의 욕망이 잠시 얼비쳐간다.

 할머니의 좌판은 허름하다. 하지만 희망의 인생이 묻어나있다. ⓒ 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