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전신마비 한미순님에게 따뜻한 메일좀 보내주세요.

그루터기 나무 2007. 6. 1. 13:16

1984년 10월 16일. 서른 살 때 결혼을 한 달 앞두고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한미순씨. 이후 그녀는 피나는 노력으로 구필화가·시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방송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삶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권의 시집과 자전 에세이 등을 펴내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한씨. 그러나 지금은 방송 출연은 물론, 사람들의 왕래도 뜸해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녀의 수족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할 봉사자가 절실하다고 합니다. 그동안 방송매체에서 다루지 못했던 숨은 얘기들과 함께 나누고, 어려운 그녀의 현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그녀를 직접 만났습니다. <새롬이 아빠 윤태  주>

 

 

 

 

전신마비 구필화가 한미순 씨, 이렇게 입으로 봉을 물고 타이핑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

 

 

비가 내리던 날,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한 한씨의 아파트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떼었다. 최대한 깔끔한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날따라 우산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바람에 비를 꽤 맞은 상태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봉사하는 아주머니와 함께 휠체어에 앉아 있던 한씨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게 사람의 정인데,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어찌 반갑지 않으리.

그녀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봐왔던 환한 모습과는 달리 근심과 외로운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하마터면 기자는 큰 실수를 할 뻔 했다. 양 손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명함을 내밀었던 것. 순식간에 옆에 있는 침대에 다시 명함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어디 편찮은데는 없으신가요?"
"네, 보시다시피…."

뒷말이 끊어지는 한씨의 말이 그녀의 건강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본인의 초췌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찾아온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기자와 마주 앉았던 것이다.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여쭸다. 답은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절실한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처럼 마음을 함께 나누며 생활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그녀이기에 너무나 절실하고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수년 전 상도동 지하방에서 살 때 기독교 방송인 극동방송을 통해 봉사 도우미 모집을 요청했다. 방송을 듣고 지방에서 스물 한 살의 한 여자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녀의 수족이 되어 봉사를 하러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국 그 앳된 여자는 한씨를 방치한 상태에서 다음날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 시간, 두 시간, 몇 시간을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한 한씨는 위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누워서 소리를 지르는 일, 그 뿐이었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는 서서히 지쳐갔다.

이제 이승의 끈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편안히 마음을 먹었다. 새벽 1시, 바로 그때 전화벨이 계속 울리면서 몇 분 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절망하고 있던 한씨는 눈을 번쩍 떴다.

'강도라도 좋으니 제발 들어와 달라'는 심정이었다고 그녀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회상했다. 다행히 119 구조대원이 출동했고 이렇게 해서 그녀는 살아날 수 있었다. 아마 하루만에 도망친 그 여자가 119에 신고하고 정신을 놓지 말라고 전화를 계속 울려댄 것 같다고 한씨는 설명했다. 이후에도 이러한 고비는 여러 번 있었다.

 

 

입으로 그렸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들

 

 

그녀가 바라는 건 구필화가·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부를 쌓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림과 시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자신처럼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활의 안정'이다. 생활의 안정이라고 해서 경제적 지원처럼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 가족이 되어 그녀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한때 방송과 매체에서 이름을 날릴 때는 돕겠다거나 취재하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제법 든 지금은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다. 나들이라도 하면 외로움이 덜할 텐데 외출이라고 해봐야 일주일에 한 번, 5분 거리에 있는 교회에 휠체어 타고 나가는 게 고작이다. 

바깥 공기를 느끼고 싶고 시원한 바깥 바람을 쏘이고 싶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외출하는 걸 꺼려하기 때문이다. 도우미 아줌마라고는 하지만 사실 급여를 받고 계약 관계에 있는 것이다. 특히 명절 때가 되면 다만 하루, 이틀이라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휴가를 줘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하루 이틀 동안 그녀는 혼자 있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도우미 아주머니 입장에서도 명절 때만 되면 속이 탈 노릇이라고 한다. 물론 한씨에게도 가족들이 있긴 하지만 각자의 삶에 바빠 한 번 찾아오기가 쉽지 않단다.

과거 방송 인연으로 경남 거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알게 되어 해마다 학교 축제 때에 초대를 받아 거창에 내려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한씨. 벌써 7년째 방문하고 있다. 차를 타고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년 봄에 그 교장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한다고 말하며 한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뷰 도중에 몇 차례의 전화벨이 울렸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저쪽 방에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수화기를 들어 얼른 그녀의 귀에 대주었다.

"사장님, 부동산 정보 드릴까요?"

광고성 전화였다. 적잖이 실망한 눈빛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의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20년 동안 손대신 이를 사용하다보니 이가 많이 상해서 나는 소리다. 이제 50세인 그녀는 서서히 틀니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20년 동안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그녀를 괴롭혀 온 온몸의 통증은 이제 만성이 돼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 그러나 역시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다. 혹여 누군가가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나 싶어 이에 봉을 물고 열심히 메일을 열어보지만 역시 스팸 메일 뿐이다. 그래도 '도착한 편지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보다는 낫단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인터뷰를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현관문까지 다가갔을 때도 한씨는 침대에 누워 기자의 뒷모습을 향해 "아내는 뭐하나요? 직장생활 하나요? 언제 한 번 같이 만났으면 좋겠네요" 등의 말을 계속 건넸다.

단 1분이라도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그녀를 두고 현관문을 나왔다. 그녀의 외로움을 반으로 나눠 가질 따뜻한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쓸쓸한 그녀의 향기가 기자의 눈과 귓전에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입으로 그린 작품들.

 

 

위 인터뷰 기사는 제가 교양잡지 월간 <아름다운 사람들>-(지금은 안나옴)에 근무할 때 취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 다시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조인 없이는 아무일 할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 한미순 씨.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입으로 봉을 물고 타이핑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누가 보낸 메일이 없나, 그저 스팸메일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싶다던 그녀.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미디어다음 독자여러분들의 따듯하고 격려되는 말, 직접 찍은 풍경 사진 등을 한미순씨께 보내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진들을 보면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지독하게 견디기 힘든 외로움, 그 외로움을 독자 여러분들께서 채워주세요...여러분들의 작은 정성과 사랑이 한미순씨에게는 큰 기쁨과 삶의 희망이 됩니다. 아래 메일 주소를 이용해 주세요.

 

 

 

한미순씨 이메일 : hmshop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