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목 메여 초코파이를 먹을 수 없던 이유

그루터기 나무 2007. 5. 29. 10:33

아홉 살인 용태는 큰 걱정이 하나 있었다. 일주일만 있으면 대학교 진학을 위해 큰누나가 서울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4남 2녀 중 다섯째인 용태는 큰누나와 열 살 차이가 났다.

특히 용태와 막내는 큰누나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정이 많이 든 터였다. 농촌 일에 바쁜 엄마 대신 큰누나가 밥을 주로 해 먹였을 뿐 아니라 도시락, 목욕, 공부까지 가르쳐 주었다. 결국 용태에게 있어 큰누나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누나, 서울 가면 편지 할 거지?”
“그럼. 편지 자주 할게.”
“누나, 서울 가면 남산타워 어떻게 생겼는지 편지로 꼭 알려줘.”
“알았어.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누나가 동화책도 보내 줄 테니까 열심히 읽어.”
“헤헤, 알았어.”

용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해 막연히 동경해온 서울을 누나를 통해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서울에 다녀 온 친구에게서 말로만 들었던 남산타워를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그러나 용태의 가슴 한켠엔 기쁨보다는 누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드디어 누나가 서울 올라가던 날 용태는 읍내로 가는 십리 길을 배웅해 주었다. 외발 손수레에 짐을 싣고 터벅터벅 산길을 걸었다. 자꾸 누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용태의 속마음은 서울행 직행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태의 그러한 바람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용태야, 엄마,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아프지 마.”
“…,”
“용태야, 이거 받아. 가다가 7거리 슈퍼에서 초코파이 사 먹어.”
“…”

 

큰누나는 용태에게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쥐어 주고는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용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시울을 적신 채 고개를 떨궜다. 고개를 들었을 버스 안에서 손 흔드는 누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너울거리는 눈물 때문이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누나를 되뇌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금방이라도 저쪽에서 “용태야” 하며 누나가 뛰어올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7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초코파이 두 개와 요구르트 한 개를 샀다.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단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용태야, 가다가 7거리 슈퍼에서 초코파이 사 먹어.”

 

 



한 입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누나가 했던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돌았다. 순간 목이 꽉 메었다. 요구르트를 벌컥 들이켰지만 시원스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사레가 들려 초코파이와 요구르트가 범벅이 되어 기침과 함께 코로 흘러나왔다. 용태는 태어나서 목이 멘다는 것을 그 날 처음 깨달았다.

집에 돌아온 용태는 뒷산에 올라가 멍하니 나무만 바라보았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베개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축축했다. 그 동안 큰누나와 함께 했던 추억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용태는 시름 속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따르르르릉.”

집배원 아저씨의 자전거 방울소리가 들렸다. 사실 용태는 누나가 서울에 올라간 다음날부터 집배원 아저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저씨는 야속하게 농민신문만 꽂아놓고는 언덕을 넘어갔다. 그런데 오늘은 누나의 편지가 드디어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집배원 아저씨.”

용태는 평소 안 하던 인사를 꾸벅 했다. 누나는 용태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안에는 부모님 전상서와 함께 용태한테만 따로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물론 다른 동생들의 안부도 물었지만 주로 용태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용태야 잘 지내지? 형, 작은누나 말 잘 듣고 있지. 누나도 고모 댁에서 잘 지내고 있단다. 사촌오빠, 언니들도 잘해주고. 다음 편지엔 남산타워에서 찍은 사진하고 동화책이랑 같이 소포로 보내줄게.”

용태는 그 날 열 번 넘게 큰누나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는 그 날 저녁 답장을 썼다. 작년부터 가지고 있던 노란 은행잎도 편지지속에 끼워 넣었다. 누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편지였다.

보름이 지났다.

“따르르릉, 소포요. 얘야, 가서 아무 도장이나 가지고 오너라.”
“네.”

집배원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태는 안방으로 뛰어가 아버지 도장을 들고 나왔다. 큰누나가 보낸 소포였다. 안데르센 동화집과 탈무드 이야기였다. 안데르센 동화책 속에는 남산 도서관 앞에서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찍은 누나의 사진도 보였다. 미술 책에서 보았던 남산타워와 정말 똑같았다.

"이야. 정말 남산타워네."

용태의 감탄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동화책은 빛이 바래져갔다. 누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갓 스무 살 처녀는 이제 마흔이 되었고 아홉 살 용태도 서른을 바라보게 되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큰누나는 명절 때 두어 번 고향을 찾았다. 결혼 후에는 그나마 발걸음도 뜸해졌다. 부모님 생신 때 찾아뵙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용태가 특별히 서울에 올라갈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용태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큰누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큰누나와 용태가 마주 앉아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용태야, 너 그때 생각나니? 20년도 더 넘었겠다.”
“그럼, 생각 안 날 리가 있나? 누나가 맨날 부침개 해주고 도시락 싸 주고….”

용태는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누나가 뜻밖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용태야, 누나 서울 올라오던 날 7거리 슈퍼에서 초코파이 사먹었니?”
“하하하. 사먹었지. 그 날 어찌나 목이 메던지…. 하하하.”

용태는 그때의 상황이 창피했는지 끝말을 잇지 못하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 당시엔 그렇게 슬펐던 기억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용태야, 이거 한번 봐. 생각나지?”

누나가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용태 앞으로 내밀었다. 뚜껑을 연 용태는 놀라 쓰러질 뻔 했다. 빛바랜 편지 묶음. 그것은 20년 전 용태가 누나한테 보낸 편지였다. 용태는 떨리는 손으로 맨 위에 놓여 있는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비닐로 코팅된 은행잎이 용태 앞으로 떨어졌다.

“아, 이… 이건….”

용태는 20년 전 자신이 보낸 편지를 눈으로 읽었다.

“누나, 오늘 편지 잘 받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 날 버스 타고 가고 나서 누나가 준 돈으로 초코파이 사 먹었어. 목 메여서 죽는 줄 알았어. 집에 가서도 누나 생각나서 계속 눈물만 났어.”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 날 용태의 편지. 20년 동안 거의 잊혀졌던 추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용태는 이어 두 번째 편지를 꺼내들었다.

“누나, 안데르센 동화집하고 탈무드 다 읽었어. 학교에 독후감 써냈는데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셨어. 누나가 사준 동화책이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용태한테는 정말 좋은 누나가 있구나’라고 말씀하셨어.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착하게 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용태는 20년 전 자신이 쓴 편지들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 당시 어린 마음을 지금 떠올리니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용태야. 누나가 이 편지 보여준 건 앞으로도 아홉 살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야. 그때 누나가 안데르센 동화책하고 탈무드 보내준 것도 동화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착하게 살아가라고 한 거야.”

 

 

 

* 위 글은 저의 어렸을 때 경험담을 사실 그대로 구성하되 제 3자의 인물을 설정해 동화풍의 기법으로 쓴 것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사실 동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