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5년 만기 적금을 타기까지...

그루터기 나무 2007. 1. 28. 23:35

 

 

5년 만기 근로자 우대저축 적금 통장

 

 

얼마전에 5년 동안 넣은 근로자 우대 저축 적금을 타는 날이었습니다. 저축 예금 중 비과세라 비교적 실속이 있는 예금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상품이지만요. 적금의 액수는 정확히 모릅니다. 모든 금전 관리는 아내가 하기 때문입니다.

적금을 타는데도 저희 부부는 그리 신이 나질 않습니다. 오히려 서글퍼집니다. 통장 속의 돈은 알토란 같은 내 돈이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남의 돈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빚잔치를 하고 나면 저희에게 떨어지는 돈이 얼마 남지 않습니다.

월급 80만 원 받고 10만 원씩 적금 넣다

그동안 제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한 기간이 꽤 있어 빚이 좀 많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적금이라 하면 붓는 재미가 있고 그런 기쁨으로 다달이 모아가는 것인데 막상 그런 기쁨이 없어진 것입니다.

적금이 만기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처음 직장 생활을 할 2000년 11월 당시, 큰 누나 집에서 기거하고 있을 때부터 누나가 적금 통장을 만들어 줘 시작하게 됐습니다. 3년 만기였죠.

그때 월급 80만 원에 첫 직장 생활을 했는데 한 달에 10만 원씩 넣었습니다. 한 번에 50만 원까지 넣을 수 있는 상품이었는데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30만 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접 넣은 건 아니었고 월급을 타면 누나에게 15만 원씩 주면서 5만 원은 조카들 과자값, 10만 원은 적금을 넣도록 부탁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저는 적금 통장에 돈이 얼마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나한테 얼마나 모았냐고 물어 보기도 좀 그랬습니다. 한 달에 10만 원씩 들어가는 형편이니 안 봐도 뻔했기 때문입니다.

통장 관리, '짠순이 아내'에게 넘어가다

그러다가 2001년 3월 지금의 '짠순이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됐고 결혼 한 달 전부터 아내와 합의하에 30만 원씩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부터 통장 관리는 아내가 도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큰누나가 아내에게 인수인계(?)를 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2003년 11월 어느 날, 아내가 제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근로자 우대 저축 예금을 2년 더 연장했다는 것입니다. 저한테는 한 마디 상의 없이 혼자서 결정을 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때까지 만기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습니다. 3년 만기 그 돈을 찾아 어디에 쓸 형편도 아니었고, 비과세인만큼 저축을 최대한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그런 결정을 하고 실행한 아내가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빨리 빨리 모아서 아파트 전세, 아니 남한산성 비탈길에서 평지로 집을 얻어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몸 아파 직장 생활 못하고 꾼 돈으로 적금 메우다

그러나 '저축 전선'에 이상이 생긴 건 2004년 2월부터였습니다. 그 해 2월 직장을 그만두고 5개월을 쉬었기 때문입니다. 100만 원도 안되는 아내의 월급으로는 생활비 보태기도 빠듯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빠져 나가는 보험금도 만만치 않은 터라 어려움은 더해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수단이 좋은 아내는 은행 돈을 빌리지 않고, 아는 누군가를 통해 돈을 빌려 생활을 했고 근로자 우대 저축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채워 넣었습니다. 돈을 빌려서라도 저축 예금을 넣어야 했던 아내. 그 마음 이해가 됩니다.

그 해 7월 저는 다시 직장에 들어갔고 100만 원짜리 월급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2월 다시 직장을 그만둠과 동시에 몸이 아파 올 10월까지 쉬어야만 했습니다. 동네 병원, 대학 병원, 종합 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빌려온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와중에 아내는 임신과 출산을 했고 출산 후인 7월부터는 아내도 저도 모두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여기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수단을 쓰던지간에 은행돈 대신 가족이나 직장에서 아는 이의 돈을 빌려 생활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물론 적금은 계속해서 넣고 있었지요. 각종 요금, 세금 등 생활비를 비롯해 적금, 보험, 형제 계 등 벌어오는 이는 없어도 돈은 계속 빠져나갔습니다.

물론 중간에 제가 한 미디어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집에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올리며 몇 푼씩 벌어들이긴 했지만 단지 용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아내와 저는 속이 얼마나 탔겠습니까?

생활은 해야겠고, 들어오는 돈은 없고 이유 없이 몸이 여기저기 아파 그 어느 곳에도 선뜻 입사 원서를 넣을 수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갔습니다. 마음의 병이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아프니 마음 또한 약해지고 일상 생활이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알뜰살뜰한 아내와 함께 다시 시작하다

5년 만기 적금을 타기까지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만기된 적금 통장을 앞에 놓고 아내와 저는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충실하게 직장 생활만 했어도 5년 동안 적잖은 돈을 모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돈으로 내년 4월 계약 만료되는 전셋집, 이 산비탈을 떠나 주차장도 있고 평지인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사실상 그 꿈이 실현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아기가 태어나면서 돈 들어갈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올 11월부터 새롭게 들어간 직장, 이젠 어느 정도 몸도 추스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직장 생활을 제대로 못한 게, 출근을 하지 못한 게 원인이 돼, 마음의 병이 생겨 몸이 많이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이 글을 빌어 그동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안하고 저를 감싸 주고 염려해 주며 용기를 복돋워 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기 새롬이와 더불어 세 식구가 언제나 웃을 수 있는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고백 같은 글을 마감합니다.

또 다른 적금 통장에 작지만 소중한 우리의 삶이 다시 쌓이기를 기대하면서….

 

 

비탈진 골목에서 평지로 이사가야 하는데...

 

 

꼼꼼하게 살림을 챙기는 아내

 

 

이 기사는 2006.2월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