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이렇게 구수한 누룽지 맛 보셨나요?"

그루터기 나무 2007. 1. 7. 12:38

 

 

먼저 밥을 보릿물과 말아 후라이팬에 얇게 깔아 놓습니다.

 

 

강추위가 계속 몰아치는 일요일. 문밖에는 한 발짝도 못나가고 뜨끈한 것만 생각나게 하는 날씨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오늘은 아내에게 누룽지를 만들어 끓여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워낙 누룽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동안 종종 아침에 누룽지를 끓여 먹고 출근을 했지만 마음 편안하게 음미하며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출근시간에 쫓겨 ‘후다닥’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끓인 누룽지를 마시다 시피하고 나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오전 10시부터 누룽지를 만듭니다. 프라이팬에 물을 약간 넣고 밥을 짓이겨 얇게 깐 다음 불을 약하게 올립니다. 누룽지가 완성되기까지 빠르면 1시간, 늦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불을 좀 세게 올리면 더 빨리 되겠지만 그리하면 누린내가 나고 누룽지의 참맛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내의 말입니다.

 

 

노릇노릇한 누룽지가 되었네요


언제 누룽지가 다 될까? TV를 한참 보다가 프라이팬 한번 들여다보고, 깜빡 졸다가 깨어 주방으로 가 봐도 누룽지는 아직 완성이 안 된 듯 합니다. 차라리 한숨 자야겠습니다. 누룽지가 완성되면 어련히 아내가 깨우지 않겠습니까.


시커먼 뚝배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룽지 밥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후 흔들어 깨우겠지요. 오늘 일요일 하루는 그냥 끓인 누룽지 밥 한 그릇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누룽지처럼 구수한 하루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점심 식사시간입니다. 예상대로 누룽지 밥이 올라 있습니다. 반찬도 필요 없습니다. 이거 한 그릇이면 ‘오케이’입니다.


일요일 하루를 통째로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누룽지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어린 시절 가마솥에서 걷어 올린 누룽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구수한 향은 어느 정도 일치하기에 그럭저럭 아내의 누룽지에 만족합니다.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누룽지 밥


저는 누룽지밥을 먹기 위해 종종 대형음식점을 찾습니다. 주로 고깃집인데 돌솥밥을 주문하면 누룽지를 먹을 수 있습니다. 돌솥에 직접 밥을 하기 때문에 밥이 눌어붙어 누룽지가 되는 것인데 밥을 다른 그릇에 덜어내고 돌솥에 물을 부으면 부글부글 누룽지가 끓어오릅니다.


뜨겁게 달궈진 돌솥이 계속 끓어올라 누룽지를 더욱 더 구수하게 만듭니다. 돌솥밥을 주문하면 고기와 기타 반찬이 후하게 나오지만 저는 그것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뜨끈한 누룽지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야 그날 식사는 아주 잘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돌솥밥은 시간이 너무많이 걸리기 때문에 부담이 됩니다. 간편하면서도 손쉽게 그리고 빨리, 끓인 누룽지 밥을 먹을 수 있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4년 동안 어떤 식당에서도 한번도 보지 못했던 메뉴 ‘누룽지 밥’을 보게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말이지요.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 역 부근에 있는 어느 곳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시간상 아무래도 점심을 먹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식당을 찾아다니는데 바로 그 때 누룽지 밥 메뉴가 적힌 식당을 보게 됐습니다. 혹시 메뉴 판만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얼른 들어가 물었더니 된다고 합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냥 서비스로 내놓는 누룽지가 아닌 정통 누룽지 맛이었습니다. 흔히 식당에서 서비스로 누룽지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먹어보면 누룽지인지 아니면 퉁퉁 불은 밥을 물에 또 불려 내놓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았거든요. ‘꼬들꼬들’하게 씹히는 맛도 없고 그냥 ‘물에 말은 밥’수준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곳 미아삼거리 부근에 있는 식당의 누룽지는 옛날 가마솥의 누룽지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슈퍼에서도 누룽지를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옛날 가마솥에서 어머니가 긁어주시는 누룽지 맛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0여명의 대가족이 살았던 그 시절. 밥을 퍼낸 큼직한 가마솥에는 밤콩 등 잡곡과 함께 고소한 누룽지가 절정(?)에 달해 있고 여러 형제들은 줄을 서서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린것들의 눈은 어머니의 주걱을 따라 움직였고 마치 썰매를 지쳐 얼음장이 금가듯 한 겹씩 벗겨내는 누룽지는 형제들의 배고픔을 더욱 더 세게 자극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