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포도 한 송이에 얽힌 애절한 사연

그루터기 나무 2006. 12. 26. 18:25

 

                  포도 한 송이 ⓒ윤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정상호(21·가명)군은 포도를 먹다가 올 8월 초 충남 서산의 한 대형할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겪었던 미담을 기자에게 털어놨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정군은 여름 방학을 맞아 집 근처에 있는 대형 할인매장의 야채와 매장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 12시에 마감을 했는데 그 시간쯤 되면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이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매일 찾아와 이곳을 서성거렸다고 한다.

웃을 때마다 누런 이가 드러나고 완전히 검게 탄 얼굴에 금이 심하게 가 제대로 보일 것 같지 않은 안경을 쓴 그 남자는 흙이 덕지덕지 붙은 낡은 옷을 입고 다니며 물건값을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물건이 있으면 한 움큼 집어 봉지에 넣으며 얼마냐고 묻는 초라한 아저씨. 그러나 한참 마감준비에 바쁠 시간에 찾아와 빤히 가격이 쓰여 있는데도 가격을 계속 물어보니 정군도 화가 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거봉 포도 한 송이를 집었다. 정군은 차라리 사지 말라는 심정으로 "그 정도면 5000원 이상 합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치고는 제 할 일을 했다. 평소 같으면 정군이 부른 가격에 실망하며 다른 곳으로 갔던 아저씨가 그날따라 한참 동안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그는 그 포도송이를 내려놓고 군데군데 알이 터져 초파리까지 붙어 있는 끝물의 포도 한 송이를 봉지에 담아 와서는 1500원에 가격표를 찍어 달라고 했다. 정군은 전화 인터뷰에서 "세일이 끝나서 그 가격에 드릴 수 없고 또 마음대로 가격표 찍어주면 혼난다고 설명해줬다"고 밝혔다.

몇 번의 사정과 거절이 있은 후 아저씨는 멋쩍게 돌아서서 다시 포도가 있는 곳으로 가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고는 방금 전 그 포도송이를 가져와 이번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또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고 정군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총각, 이번 한 번만 1500원에 찍어줘. 응?"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우리 마누라가 포도를 좋아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 못 나온다고. 내가 지난번에 와서 여기 포도 있다고 하니까 몇날 며칠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고 해서 말이야. 여편네도 주책이지. 이렇게 비싼 포도를 먹고 싶담?"


정군이 500원 깎아 무엇 하냐고 아저씨에게 묻자 그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과 백 원짜리 네 개, 오십 원짜리 두 개를 꺼냈다. 가진 게 이것밖에 없다며 포도 사려고 차비 안 쓰고 걸어왔다는 아저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 정군은 당시를 회상했다. 2000원만 있으면 멀쩡한 것으로 한 송이 사다주겠지만 못난 탓에 그것도 못해준다고 한탄하는 아저씨 앞에서 정군은 마음이 울컥했다고 그때의 심경을 고백했다.

정군은 돌아서서 힘없이 걸어가는 아저씨를 불러 세우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냉장창고로 가 새 포도 상자를 뜯었다. 그리고 가장 크고 싱싱해 보이는 한 송이를 들고 나와 저울대에 올려놓았다. 가격은 5000원 남짓. 정군은 포도가 올려진 저울대 아래에 손가락을 넣고 살짝 들어올려 1500원이 안 되도록 가격을 맞춘 다음 가격표를 뽑아 포도봉지에 붙였다고 기자에게 털어놨다. 결국 3500원 어치를 더 준 셈이다.

"아저씨, 가격 안 보이게 잘 들고 가세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아래 이가 듬성듬성 빠진 입을 열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산대로 향하는 아저씨를 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정군은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돈을 받고 시간제 일을 하는 입장에서 적든 많든 매장에 손해를 끼친 정군의 행동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모두 법이나 원칙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매장에 끼친 3500원의 손해를 물어주면 그만이지만, 그 돈으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은 아저씨를 생각한다면 매장 측도 정군을 나무라기보다는 칭찬하지 않을까 하는 훈훈한 상상을 해본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