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올드 팝에 취해보세요"

그루터기 나무 2007. 8. 20. 13:11


 

지하철 안에서 올드 팝송이 크게 울려 퍼지는 때가 있다. 옛 곡만 모은 CD를 판매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미로운 음악이 좋아 내려야 할 역에서 주춤하기도 하고, 장사꾼이 옆 칸으로 가면 일부러 따라가 목적지까지 올드 팝송을 들으며 가곤 했다.

약한 비가 오락가락하던 어느날, 두 사람과 서울 종로구청 부근 한 올드 뮤직 바에 갔다. 옛 노래라면 죽고 못 사는 세 사람, 입맛을 다시며 그곳에 들어갔다.

지하에 자리잡은 그 바 이름은 지음(知音)이라고 했다.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와 그의 친구 종자기 사이에 얽힌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정한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인은 진정으로 음악을 아는 친구를 떠올리며 바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설명했다.

몇 평 되지 않은 가게에 테이블은 고작 네다섯 개. 대신 옛 노래가 풍성하게 그곳을 채웠다. 한쪽 벽은 우리 것이든 외국 노래든 당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LP레코드가 도배하고 있었다. 나나 무스쿠리, 존 레논, 엘비스 프레슬리, 스팅 등. 간혹 제목도, 가사도, 가수도 잘 모르지만 수천 번은 들어봤음직한 낯익은 음악이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음악에 순간적으로 점령당하는 한 사람 때문에 이야기가 종종 끊겼다. 말하던 사람만 민망하게 "앗, ○○ 노래다"라고 외치며 미소짓는 그. 사실 나 또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어떤 노래가 나올까에 신경이 더 쏠렸다.

20년 직장 그만두고, 올드 뮤직 바 열어

 

가게 주인과 간단하게 인터뷰를 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LP레코드와 CD는 각각 1800여장. 소싯적부터 LP레코드를 수집했다는 40대 중후반의 주인은 방송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음반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직장 생활하다가 그만두고 지난해 7월 이 가게를 열었단다. 좁디좁은 장소. 그러나 주인은 확장 이전할 계획이 없단다. 음악과 추억이 있는 고즈넉한 장소인데 확장하면 이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이 가게에서는 술과 음악과 추억을 동시에 판매하고 있었다.

신청곡을 받아 전축에 판을 걸고, 다시 다음 곡을 준비하면서 빈 앨범을 정리하는 주인. 주변을 둘러보니 쭉 혼자서 술을 마시던 한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상태였고 왼손엔 담배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오른손엔 술잔이 들린 가운데 그는 약간씩 고개를 끄떡이며 중얼중얼 옛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니 담배를 마시고, 노래를 태우며 술을 듣는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다른쪽 테이블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면서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더 많이 찍으라는 듯 아랑곳없이 춤 솜씨를 보여줬다. 춤을 춘 이는 서울 상암동에 사는 김광열(59)씨


이곳에선 춤춘다고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음악소리가 너무 크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모습, 분위기가 좋아 단골손님들이 몰리는 모양이다. 중요하고 심각한 이야기 할 거라면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 좁은 공간이지만 손님들은 계속 들어왔다.

김광열씨와 일행인 김지호(남·71)씨는 "이곳엔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악이 많아 일주일에 두 번은 온다"며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서 따라 불렀다. 그 시각 바깥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간간이 빗방울이 내리는 가운데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과, B.J Thomas 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흘러나왔다.

주인도 음악에 취해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

술과 노래와 추억에 취한 이는 비단 손님뿐이 아니었다. 안주 나르고 판 걸며 서비스하던 주인도 시간이 나면 한 잔 술, 한 개비 담배와 함께 곧잘 음악 속에 빠져들곤 했다. 주인은 올드 뮤직을 통해 추억과 낭만을 뽑아 먹으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영업이라기보단 자기 만족을 위해 이 일을 하는 듯 보였다.

가끔 '지지직' 하는 소음이 섞여 나오지만 그것이 바로 LP레코드의 매력이자 '맛'이지 않은가. 노래방에서 고급, 고품격을 자랑하는 음질의 노래, 연주가 흘러나온들 이곳 LP판과 어찌 그 맛을 비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먼저 나간 뒤, 남은 둘은 함부로 맥주잔을 비우지 못했다. 이 맥주잔을 비우면 나가야 하고 그러면 노래를 못 듣기 때문이다.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 이러다가 벌써 몇 십 분째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조용필의 '큐'를 신청했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주인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고 담배를 마시고, 노래를 태우며 술을 듣던 그 외로워 보이는 남자도 입을 맞춰 이 노래를 함께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가게를 나왔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술과 추억에 취한 우리는 휘청거렸다. 아쉬운 마음에 일행의 집에서 못 다한 올드 뮤직을 들으며, 또 한번 휘청거렸다.

올드 뮤직에서 삐져나오는 추억이 이처럼 맛있고 달콤하며 심지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던가? 예전엔 왜 그 맛을 몰랐을까. 추억을 너무 오랫동안 안에 가둬두고 꺼내놓지 않아 무뎌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앞으로는 올드 뮤직을 통해 추억을 종종 곱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래 동영상은 가게 안에서 듣는 올드 팝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