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미안해 여보, 이력서 다시 쓸게"

그루터기 나무 2007. 8. 12. 18:34

명섭은 직장을 그만둔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났지만 새 직장에 들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에 빚만 늘어갈 뿐이었습니다. 살림을 도맡아하는 아내는 한숨만 늘었습니다.

“여보, 좀 알아봤어요?”
“응, 계속 알아보는데 마땅치가 않네.”
“우선 임시라도 들어갈 데 없을까요. 다니면서 더 좋은 직장 있으면 알아보게.”
“나와 있는 일자리가 없네. 요즘 워낙 불황이라….”

명섭이도 여러 군데에 이력서를 넣어 보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아 번번이 포기를 해야만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명섭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온 몸이 쑤셔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지 못해 병이 난 것입니다.

명섭이가 전에 직장에서 전문 신문 기자 생활을 하며 가방 메고 하루종일 취재하러 돌아다닐 때는 비록 힘들고 피곤해도 이렇게까지 몸이 아프진 않았습니다. 명섭은 오히려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명섭은 전 직장에서 메고 다녔던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걸쳐 보았습니다. 너무 가벼웠습니다. 가방 속에 책을 몇 권 넣고 안방, 거실을 돌아다녔습니다. 마치 직장에 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마침 퇴근해 들어오던 아내가 거실 유리창을 통해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어…. 와, 왔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명섭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말을 더듬었습니다.

“여보, 저…. 우리 큰일났어요.”
“왜?”
“사실은 석달 전부터 생활비가 부족해서 아는 사람한테 돈 빌리고 있어요. 당신 취직할 때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벌써 3백만원이에요"
“….”

명섭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힘이 빠졌습니다. 결혼 전 명섭이가 들어놓은, 이율이 꽤 높은 적금을 그동안 아내가 빠짐없이 넣었고 한 번이라도 거르거나 미뤄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돈을 꿔서 채워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지금까지 잘 참아왔잖아."
“….”

이번에는 아내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취직하기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순 있었지만 이럴수록 명섭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서는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아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조건에 맞는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명섭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1주일 전에 면접을 보았던 한 회사에서 채용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월급이나 다른 조건을 구체적으로 협의해야하니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한 번 회사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정말 잘 됐다. 그동안 마음 고생 많았죠?”

명섭의 아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 날 저녁 명섭과 아내는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활동 영화였지만 명섭의 눈과 귀에는 영화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양복 입고 출근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얼른 화요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머릿속에 가득 찼습니다.

다음 날 저녁 퇴근해 들어온 아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큼직한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여보, 정말 축하해요.”
“웬 축하? 그런데 무슨 선물이 이렇게 큰 거야?"
“당신이 평소 갖고 싶어하던 거예요. 펼쳐봐요.”
“뭘까?”

포장 속에는 새카만 가방과 구두 그리고 조그만 구두칼이 담겨 있었습니다. 명섭은 지난 3년 동안 가지고 다녔던 가방이 지퍼가 벌어지고 또 작다고 아내에게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엔 구두에서 물이 새 발이 퉁퉁 불었던 것을 아내는 속으로 늘 간직하며 마음 아파했던 것입니다.

“여보, 어때요? 가방 지퍼 벌어지고 좁아서 서류 넣기도 힘들고 구겨진다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이 구두 3년 동안 갖고 다니던 구두 표로 산 거니까 잘 신어야돼요. 걸음 험하게 걷지 말구. 새 신발이라 처음에는 손으로 신기 힘들 거예요. 구두칼 가지고 다니면서 쓰세요. 작아서 갖고 다니는데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순간 명섭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휴대용 구두칼까지 챙겨주는 아내의 마음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진작에 취직하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습니다.

그 날 밤 아내가 잠든 사이 명섭은 아내가 사온 새 구두를 신고 가방을 멘 채 안방과 거실 을 돌아다녔습니다. 내일 그 회사에 협의하러 갈 생각을 하니 잠도 오지 않고 한없이 들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출근한 직후 명섭은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새 구두를 신고 굳이 멜 필요도 없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지하철 출입구를 통과하려고 할 즘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김명섭씨죠?”
“예. 그런데요.”
“여기 X 회사인데요. 오늘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했었죠. 그런데 다른 분이 이미 들어오기로 약속이 돼서…. 어쩌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명섭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습니다. 명섭보다 급여를 낮게 제시한 사람이 먼저 뽑힌 것이었습니다.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잘 하고 오라던 아내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명섭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정신 없이 뛰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명섭은 컴퓨터를 켜고 자기소개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취직 선물에 먼지가 쌓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이력서입니다.

 

 이력서 뒷장입니다.

 

 

위 이야기는 제가 경험한 것을 동화 형식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사실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