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34년 동안 탯줄 보관하고 계신 분 봤나요?"

그루터기 나무 2006. 12. 28. 23:46

 

 

이 병 속엔 처형과 아내와 처제의 탯줄이 보관돼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뱃속에 있는 동안 생명선이었던 짤막한 새롬이의 탯줄을 나중에 아기에게 보여주기 위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탯줄을 열어보니 솔개미 몇 마리가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쾌쾌한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았습니다. 탯줄을 다시 밀폐된 곳에 보관하는 동안 아내가 제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친정에 가면 우리 셋 탯줄 아직도 있는데.”


‘우리 셋’ 이라 하면 여섯 살 난 딸을 두고 있는 처형과 아내 그리고 처제인데 처형 나이가 올해 서른셋입니다.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면 34년째인데,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신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33년 된 탯줄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지난 일요일, 아기를 데리고 처갓집에 갔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새롬이를 봐주시는 동안 저는 세 딸의 탯줄이 들어 있다는 병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혹시 탯줄에 병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장인어른의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서서히 뚜껑을 돌렸습니다. 40일전 아기를 출산한 아내가 갓난쟁이일 때 달고 있었던 탯줄이 이 속에 들어 있다니…. 엄청난 비밀을 벗기기라도 하듯 제 마음은 떨렸습니다.


드디어 뚜껑을 연 순간 누런 삼베가 보였습니다. 더 끄집어내니 세 개의 삼베조각이 나왔습니다. 각각의 삼베에는 처형이름인 은주, 아내 영(령희), 막내 진(진실)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누런 삼베에서 풍기는 냄새는 보름 전 떨어진 우리 아기 새롬이 탯줄 냄새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하나 풀어보았습니다. 세 개의 탯줄에는 묶인 실이 그대로 감겨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로 빨래집게 같은 걸 사용하는데 30여 년 전에는 실로 묶은 후 가위로 잘랐기 때문에 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30년 전으로 세월을 돌렸습니다. 응애응애 울다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내, 아니 아기. 그 아기가 커서 벌써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리고 있는 지금의 모습도 떠올렸습니다. 삼베를 펼치는 순간 30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신비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장인어른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자식들의 탯줄을 그것도 온전하게 보관하고 계실까 하고 말이지요. 33년 동안 이사를 다닌 횟수만 예닐곱 번인데 그때마다 장인어른은 잊지 않고 탯줄이 든 화장품 병을 잘 챙기셨던 것입니다.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태어난 순간 달고 나왔던 생명의 흔적을 이처럼 소중하게 간직하셨을까요? 자식들이 그리워질 때 한번씩 꺼내보셨다는 장인어른. 저는 알고 있습니다.


두 딸은 시집보내고, 막내딸도 둘째 딸집에 맡겨놓고 늘 적적해 하시며 홀로 막걸리를 주식으로 살아가시는 장인어른이 자식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말라비틀어진 탯줄을 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찍어내셨는지 말이지요.


간혹 딸들이 몇 만원 되지도 않는 용돈을 쥐어드리면 괜찮다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던 장인어른이십니다. 물론 겉으론 엄하게 ‘공자왈 맹자왈’하시고 특히 약주만 드시면 옛 것에 심취해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 내면에는 언제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앞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펼쳐진 세 딸의 탯줄이 그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처형 은주, 아내 영희, 처제 진실의 탯줄.

 

34년째 보관중인 처형의 탯줄

 

 32년째 보관중인 아내의 탯줄


30년째 보관중인 처제의 탯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