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보낸사연

허수경의 정오의 희망곡에서 뽑힌 내 사연

그루터기 나무 2006. 10. 12. 13:34

안녕하세요?
수경씨!
충남 서산 산골 마을의 추억 어린 저희 집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희 집은 1940년대 흙으로 지어진 흙집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일제 시대에 남의 집 농삿일을 대신 해주고 그 대가로 지어 준 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오른쪽을 보면 주먹만한 열매가 열리는 커다란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샘이 있습니다. 물론 손으로 열심히 펌프질하는 것이었죠!
어렸을 때 그 추운 한겨울에도 열심히 물을 푸어 올리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곤 하였습니다.


샘터에는 커다란 청포도 나무가 철조망 울타리를 휘감아 돌고 있었고 여름만 되면 주렁주렁 열린 청포도가 앞마당을 가득 채우곤 하였습니다.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네모난 화단이 있습니다. 화단에는 커다란 사과나무하고 배나무가 있었죠! 그 나무 밑에는 딸기를 심었고 그 뺑 둘레에는 국화, 칸나, 다알리아, 나팔꽃 등 형형 색색의 꽃나무를 심어 때만 되면 우리 집 앞마당은 그야말로 푸른 화원이었답니다.


화단 옆에는 대청마루가 있었습니다. 대청마루를 통해 안방, 윗방, 사랑방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뭇결 무늬 마루 밑에는 깊은 굴이 있었습니다. 굴속은 시원하기 때문에 생강이나 감자 등 농작물을 캐어 썩지 않게 보관하기도 했고 또

어렸을 때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김치같은 것을 넣어두기도 하였습니다. 동무들과 숨바꼭질을 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윗방에서 어머니께선 저희 6남매를 낳으셨습니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말이지요. 아이들 여섯,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많은 식구가 한 지붕에 살면서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어머니 몸이 허약한 탓에 젖이 잘 나오지 않아 작은형과 저 그리고 막냇동생은 미숫가루로 어머니 젖을 대신하였습니다.


6남매 모두 두 살 터울인 탓에 큰누나, 큰형이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살림은 더욱 더 쪼들려 수천 평이나 되는 집주위 과수원의 과수를 뽑아 버리고 특용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갓난장이때부터 저희 남매들은 부모님을 도와 논. 밭에서 일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세월은 흘러 1990년 3월 1일, 내 나이 열 일곱 살 때 고등학교 입학 하루를 앞두고 엄청난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17년을 살아온 정든 집이 불과 10분만에 거대한 포크레인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새 집을 짓는다는데 뭐 서러울 것도 없고 서운할 것도 없고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인데 힘없이 쓰러지는 내 집을 보고 있노라니 그 숱한 추억들이 마른 흙더미 속에 묻혀 버림에 주르르 눈물이 났습니다. 그후 부모님은 텃밭에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그 안에서 생활하셨고 저와 남동생은 이웃집 단칸방 하나를 빌려 그곳에서 두 달간 생활을 하였습니다.


두 달 여만에 새로 지은 저희 집은 빨간 벽돌로 된 완벽한 슬래브 집이었습니다. 입식 부엌에 목욕탕에는 욕조도 있었고 여하튼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저희 집 같은 집이 없었습니다. 초가집이거나 아니면 흙으로 만든집에 기와장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는데 저희집은 경제 혁명과도 같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우리집에 들어오면 서울이고 대문 밖을 나오면 농촌이라고 말을 하며 감탄을 하였습니다


1993년 저는 대전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 대전에 자취 집을 구했습니다. 대전에서 1년 학교를 마치고 94년 1월, 내 나이 한창 청춘인 스무 한 살 때 입대를 하였습니다.


입대한지 8개월만에 닷새 짜리 휴가를 나왔는데 고향집에 달려가 보니 집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빨간 벽돌에 네모 반 듯 삭막했던 집 주위에 수백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작은 묘목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어디서 그토록 많은 나무를 구해 오셨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휴가를 나올 때마다 그 작은 묘목들은 어느덧 쑥쑥 자라 있었습니다.


제대한 후 보니 더 이상 작은 나무가 아닌 제법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워낙 많은 나무에 휩싸이다 보니 어디가 대문이고 어디가 뒷문인지 처음 오는 사람은 못 찾을 정도니깐요. 무슨 나무들인지 궁금하시죠? 제가 알고 있는 데까지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은행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단풍나무, 호두나무, 동백나무, 향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등나무, 측백나무 등등 그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백 그루의 나무가 울창한 화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푸른 화원이라고 저는 말을 하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넓고 아름다운 집에 부모님 두분만 살고 계신다는 겁니다. 누나들 모두 출가하고 형들은 모두 객지에서 직장 생활하고 저는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그나마 부모님의 농삿일을 돕던 남동생도 올 1월에 입대를 하였습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곤 하는데 올 때는 항상 꽃나무 서너 그루씩을 캐어 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곳 대전 자취 집에는 수십 개나 되는 화분이 있습니다. 모두 시골에서 가져온 꽃나무들이랍니다. 대전 자취집 또한 푸른 화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수경씨 어때요?


저희 시골집 같은 곳에 살고 싶지 않으세요? 사시사철 때가 되면 야채며 과일이며 완전 무공해 식품을 나무에서 밭에서 직접 따다 먹는 기분 얼마나 상쾌한지 모른답니다.
시골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은 그 깊은 맛을 모를 것입니다. 더불어 푸르디푸른 나무들과 자연을 벗삼아 남은 인생을 보내시려는 늙은 부모님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허수경씨! 저희 집 푸른 화원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 신청곡 『라구요』- 강산에

1997년 8월
MBC FM 허수경의 정오의 희망곡 【saturday quick service】

 

다음은 허수경씨와의 전화 인터뷰 내용


허 : 여보세요
윤 : 여보세요
허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윤 : 예, 반갑습니다.
허 : 그러니까 충남 서산의 산골 마을, 1940년대 흙으로 지어 진 흙집에 몇 살까지 사신 거지요?
윤 : 제가 열 일곱 살 때까지 살았습니다.
허 : 지금은 몇살이구요?
윤 : 지금은 스물 네 살입니다.
허 : 아, 그러세요. 그러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시겠네요?
윤 : 그렇죠.
허 : 아니 근데 그때 그 집이 어떻게 해서 살게 된 집이예요?
윤 : 제가 듣기로는 할아버지께서 남의 집 농삿일을 대신 하 시고 그 대가로 지어진 집이라고 합니다.
허 : 아, 그래서 1940년대 흙으로 지은 흙집에서 살게 되었 군요. 이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고, 그 집이 어땠어요?
윤 : 먼저 대문을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자두나무가 있었거 든요. 열매가 주먹만해요
허 : 뚝 따서 먹으면 맛있었어요?
윤 : 그렇지요.
허 : 입안에 시큼한 물이 고이네요. 그리고요?
윤 :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샘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는 펌프질하는 것이었어요. 여름에 시원하잖아요. 그리 고 그 위에 포도나무가 있었어요. 청포도
허: 청포도요?


윤 : 네, 샘 위에다가 철조망을 올려서.....
허 : 아, 청포도가 철조망 타고 넘어가게......
윤 : 예.
허 : 여름에 청포도가 얼마나 예쁘게 열렸을까요? 또요?
윤 : 그 앞에는 화단이 있었어요. 네모났었는데 거기에 사과, 배나무 있었구요 그 주위에 꽃나무가 있었어요, 국화, 칸나, 나팔꽃 그리고 밑에는 딸기 심고...
허 : 딸기요? 딸기 열릴 때요, 너무나 감탄했어요. 그 안에 꽃 눈 있는 데가 점점 커지더니 딸기가 되더라구요. 호호호
어렸을 때 그거 지켜보면서 어땠어요?
윤 : 저는 좋았죠. 집주위에 자연산으로 먹을 것이 많으니까 요. 과일이나 야채...
허 : 그리고 옛날 집들은 나무, 꽃들만 많은 게 아니라 집 구 조도 재미있잖아요.
윤 : 구조는 농촌집 거의 비슷하잖아요. 부엌 아궁이에서 불 을 때면 방고래 타고 안방, 윗방, 사랑방까지 뜨거워지 는 거지요
허 : 아랫목 차지하려고 경쟁하지 않았어요?
윤 : 아랫목은 늘 아버지 차지였지요.
허 : 그리고 또 옛날 집에 창고 있잖아요. 아주 묵직한 자물 쇠로 채워진 창고, 어렸을 때 한 번쯤은 거기 숨어들어 갔던 추억이 있을텐데...
윤 : 거기는 곡식 넣어 두고 어머니께서 살림하시던 곳이죠.
허 :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윤 : 6남매입니다.


허 : 6남매요?
윤 : 예, 모두 두 살 터울인데 윗방에서 낳으셨어요. 호롱불밑 에서. 병원에는 안가고. 그때 전기도 안 들어올 때였거 든요. 제가 다섯 살 때 전기가 들어왔으니까요.
허 : 그러니 다 태어났을 때 얼마나 잘 생겼었을까요. 어둠 컴컴해서. 6남매가 그 집에서 크면서 뛰어다니고 장난치 고 그 창고에 숨어서 숨바꼭질하고 그랬겠네요.
윤 : 예.
허 : 그 집 떠나올 때 참 아쉬웠을 것 같거든요. 열 일곱이면 어린 나이도 아니잖아요?
윤 : 예,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죠.
허 : 그때 기억나요? 떠나올 때?
윤 : 그때가 90년 3월1일날 집을 새로 짓기 위해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툭 건드리니까 부서지더라구요. 힘없이 와르르 순식간에 흙더미만 남은 거예요.
허 : 흙집이니까요.
윤 : 얼마나 서운하고 서럽던지.. 새로 집을 짓는다는데 기뻐 해야 할 일인데 너무 서운하더라구요. 예전의 추억들이 생각이 나서
허 : 그러셨겠지요! 그러면 그 집 허물고 나서 집 지을 동안 어디서 생활하셨어요?
윤 : 아버지 어머니는 밭에다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생활하셨 구요, 저와 동생은 옆집에 방 한칸 얻어 두달간을 생활 했어요.
허 : 그래서 새롭게 지은 집은, 그렇게 고생해서 비닐하우스

에서 생활하고 남의 더부살이하며 지어 놓은 집은 마음
에 들었어요?
윤 : 집은 네모 반듯하게 빨간 벽돌로 된 슬라브 집이었어요.
허 : 신식으로?
윤 : 예. 신식으로 지었지요.
허 : 옛날에는 양옥집이라고 했잖아요.
이젠 컸어요. 어른이 됐는데 옛날 그 집 추억에 잠기면서 새로 지은 집에서 아직까지 살고 계신거예요?
윤 : 지금 부모님 두 분만 거기 살고 계시구요, 누나들은 모두 출가하고 형들은 객지 생활하고...
허 : 아, 이제는 따로따로 제 갈길 찾아 갔네요?
그럼 윤태문씨는 어디서 지내세요?
윤 : 저는 대전에서 학교 다니고 있거든요. 자취집이예요.
허 : 어때요?
부모님만 집에 살고 계신데 옛날처럼 나무 많지 않고 빨 간 벽돌만 네모 반듯한 집이라 좀 싫다 하지 않으세요?
윤 : 집 지을 당시에는 썰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94년 1월 에 군대를 가서 8개월만에 휴가를 나왔는데 아버지께서 묘목들을 수백 그루나 갖다 심으셨어요.
허 : 수백 그루요?
윤 : 예, 정말 수백 그루나 되었어요.
허 : 과수원을 하실 작정이셨나봐요?
윤 : 전에 우리 집이 과수원이였었거든요.
허 : 아, 옛날에? 그래서 그렇게 자두나무, 청포도가 많았구요
그래요? 무슨 무슨 나무 있었는지 기억나요? 빨간 벽돌

집에 새로 심은 나무들.
윤 : 지금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는 은행, 배, 사과, 앵두, 자두, 대추, 그리고 뽀로스나무라고 있거든요. 혹시 아시 는지 모르겠네요?
허 : 뽀르스 나무요?
윤 : 예, 잘 모르실 것 같은데요.
허 : 잘 모르겠어요.
윤 : 단풍, 호두, 포도, 동백, 밤나무등 셀 수도 없어요. 제가 모르는 나무도 많구요. 집 주위에 나무가 워낙 많으니까 뒷문, 쪽문도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못 찾을 정도예 요. 저는 알고 있으니까 들어갈 수 있지만...
허 : 그래요. 울창한 숲이겠네요?
좋겠어요. 부모님이 거기서 생겨난 열매들 따다가 주시 지요. 그거 다 무공해잖아요?
윤 : 그렇죠.
허 : 가끔 슬쩍 나무 몇 그루 가져오기도 하지요?
윤 : 예, 대전으로 가지고 와서 화분에 심곤 하지요.
허 : 행복하시겠어요.
그런 꿈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추억이 가슴속 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쁜 집 가슴속에 지었습니다.
윤태씨!
오늘 보내 주신 사연 너무 감사드리구요, 청해 주신 노 래 지금 흐르고 있어요.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같이 들으면서 그 추억 속에, 숲속에 다시 들어가봐요.

 

당시 이 방송내용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해 이것을 다시 CD로 만들었는데, mp3 파일이라 블로그뉴스에는 올리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