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보낸사연

라디오에 사연 보내게 된 '긴 사연'

그루터기 나무 2006. 9. 27. 17:45
 

 

 

A4 용지로 뽑아 만든 라디오 에세이 '사연'

 

 

출판하지 못한 우리들의 시집 '별 그림자'

 


라디오 방송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6년 12월 28일, 대전에서 전문대를 다니고 있을 때 자취방에서다, 김현주의 FM 음악 살롱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청취자 두 명의 전화를 받아 퀴즈를 내어 주고 푸는 코너였다.


어린 시절, 라디오 속에 사람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김현주씨가 방송국 스튜디오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했었다.


그렇게 막연함으로, 생각 없이, 설마 설마 하며 전화번호를 누른 것이, 그것도 신호음이 채 한 번도 울리기 전에 음악 살롱 작가가 받아버린 것이다. 작가가 요구하는 대로 이름, 나이, 학교, 전화번호를 엉겁결에 알려주고, 노래한곡 나가고 나서 다시 전화를 드릴테니 침착하게 퀴즈를 풀면 된다고, 작가는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생방송이니 방송에 부적합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노래가 한 곡 나가자 정말 전화가 왔다. 작가의 요구 사항이 또 있었다.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전화기와 라디오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리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잠시 후면 청취자 두 분을 모시고 퀴즈를 풀 것이라는 김현주씨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참 신기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결국 내 자신이 라디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날 퀴즈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하고 버버 거리다가 2:0으로 패하고 말았다. 너무나 떨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긴 했어도 상품은 준다고 했다. 이긴 쪽에게는 꽤 값이 나가는 전자 수첩을, 내게는 5천원짜리 도서 상품권 10매를 보내 준다고, 작가에게 주소를 남기고 전화를 끊으라는 김현주씨의 멘트가 있었다.

 

일주일 후에 등기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방송국에서 보낸 것이었다. 겉봉에는 컴퓨터로 뽑아낸 메모가 붙여 있었다.'귀하께서는 김현주가 진행하는 FM 음악 살롱에서 상품에 당첨되셨기에 상품을 보내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과연 그 안에는 두툼하다 싶을 정도로, 빳빳한 5천원권 도서 상품권 10매가 들어있었다.

변변히 밥도 못 챙겨 먹는 가난한 자취생에게 있어서는 꽤나 큰 수입이었다. 때마침, 건설 현장에서 소장이던 작은형이 공사를 끝내고 현장을 철수하면서 현장에서 fax 한 대를 가져온사건이 있었다.


그날부터 방송 사연 원고는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름을 두 개로 바꾸어 가며, 학교 주소와 집주소를 번갈아 적어 가며, 일주일이 멀다 하고 학교로, 집으로 상품권이 날아들었다. fax로 사연을 보내고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면,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앞 화장품 가게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크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내 이름과 사연이 유명한 DJ이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 나왔다.


버스 안에서도 내 사연이 나왔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날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아니 알아볼 수도 없겠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광주에서 낯선 여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오기도 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내 사연이 너무 맘에 들어 펜팔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한 번은, 너무 자주 사연을 보내는 까닭에 이소라씨가 진행하는 밤의 디스크 쇼에서 초대 손님 임창정씨가 나왔는데, 내 사연을 읽고 보낸 사람 이름을 말하다가 ' 어 윤태문? 윤태문, 많이 듣던 이름인데... 어, 이분 혹시 단골손님(상품 타기 위한) 아닌가? 하며 찍히기도 하였다.


그렇다. 나는 매료되었다. 아니, 중독 되었다. 전화비도 평소보다 열배 이상 나왔다.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방송에 사연 보내기에 매달렸다. 공부도 할 수 없었다. 항상 라디오 앞에 앉아서 내 이름이 나온다 싶으면, 녹음 버튼을 정신없이 눌러 댔다.


그렇게 해서 녹음한 내 사연이 60분용 카세트 테이프로 3개나 되었다. 물론 놓친 사연들도 많았다. 편지로 보낸 사연들은 언제 방송이 나올지 몰랐다. 물론 원고도 남아 있지 않다. 방송이 나왔다는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열기가 수그러든 것은 97년 11월 IMF가 슬슬 감돌면서 방송사를 협찬하던 회사들이 줄어든 탓이었다. 사연을 소개해주되 상품은 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사연 보내는 일도 뜸해졌다.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이었을까? 우연히 서점에서 보게 된 월간호, 바로 '행복'이었다. 책 끄트머리에 '우리 친구해요'라는 코너에 몇몇 사람들의 주소와 사연이 적혀 있었다. 펜팔 코너였다.


지체없이 펜을 들었다. 도저히 내 글을 책에 실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눈물나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식사를 하려고 밥상 앞에 앉으면 목이 메어 와 밥반, 눈물반 먹은 적이 많았습니다. 스무다섯해의 삶 중 철저히 고독해야만 했던 지난 6년이었습니다. 이제 가슴이 따뜻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비록 혼자뿐인 식사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보내 온 편지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책이 청주 지역 서점에 나오기도 전에, 전국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글이 실렸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두달간이나 줄기차게 편지가왔다.두 달이 지나자 편지가 뜸해졌다. 또 사연을 올렸다. 이번에는, 학교 주소에서 자취집 주소로 바꾸고, 본명인 '윤태'에서 아명인 '윤태문으로 바꾸어서 사연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또 실렸다. 행복 98년 각각 3월호, 9월호였다.


98년 한해는 그야말로 편지만 쓰다가 일년을 보냈다. 지금도 수북히 쌓여 있는 편지들을 보면 내 자신도 놀랄 정도이다. 시간이 지나자 편지 쓰는 일도 싫증이 났다. 4학년이 되어 공부를 해야 했기에.


하지만 글쓰는 것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필요했다. 글이 아니면, 대화라도 할 목적으로 PC통신에 아이디를 만들었다. 채팅에 매달렸다. 채팅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보면 놀라 쓰러질 정도로 빠른 한글 타수였다. 그 빠른 타수를 이용하여 PC통신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3류 소설 같은 것이었다. 반응이 정말 좋았다. 다른 사람들 글보다 조회 횟수가 월등히 많았던 것이다. 공부는 늘 뒷전에 있었다. 여러 친구들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실속 없이 딴전만 피우는 내게 결정적으로, 앞으로의 진로를 바꾸어 놓게 하는 일이 있었다.


99년 5월, 비 내리던 날에 시 모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홍성숙 교수님의 영미시 강의를 들으면서 보고서 끝머리에 한 두편씩의 시를 매달아 제출했던 것을, 교수님께서는 꽤나 칭찬을 하셨다. 신춘 문예에 도전해 보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용기를 얻어 시에 대한 불타는 정열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시 모임에서는 공동 창작 시집을 만들어 내기로 결의하고 9월초 낭송회 및 시화전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곧 작업에 착수했다. 그 동안 틈틈이 장난처럼 습작했던 시를 접어두고 좀더 심도있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에 미쳐버린 것이다.


영문과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사전보다 국어사전에 밑줄이 더 많이 그어 있고, 영어책보다는 시집을 옆에 끼고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된 작업 끝에 8월말, 공동 창작 시집 「별 그림자」300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물론 시집 만드는 비용을 마련키 위해 노동 현장에서도 며칠간 일을 해야만 했다.

9월초 낭송회 및 시화전의 홍보를 위해 청주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기증을 하고 청주 MBC FM 정오의 희망곡에도 직접 찾아가 기증을 하게 되었다.


「별 그림자」중에서 시 몇 편을 낭송해 주겠다는 청주 MBC FM 정오의 희망곡 DJ인 정은영씨의 약속대로 그 날짜에 녹음을 하기 위해 시 모임 회장격인 노찬 선배와 나의 자취 집에 가게 되었다.


사연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에 방송국에 보냈던 사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전에 청주 MBC FM에 초대를 받아 60분 짜리 일일 DJ를 했었다

는 이야기를 하자, 노찬 선배는 놀라고 있었다. 못 믿는 눈치이기에 어설프게 녹음된 일일 DJ한 테이프를 들려주자 노찬 선배는 더더욱 놀라워하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연이 방송이 될 수 있었느냐며 그 동안 방송에 보냈던 사연 원고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책 한권 분량은 족히 될 것이라고 말하자, 노찬 선배는 무릎을 탁 쳤다.


"야, 그거 책으로 한 번 내봐라. 괜찮을 것도 같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답 대전 자취방으로 달려가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누렇게 바랜 방송 사연 원고들을 들고 청주로 달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장난 카세트에 씹혀 끊어진, 방송 사연이 녹음된 테이프를 정성스레 수술했다. 잘려 나간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연' 이라는 나의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부끄럽기까지 한 고백적인 글도 많다. 살아가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생활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그것도 전국, 혹은 지역으로 전파는 타고 나가는, 뭇 타인들의 호감이나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글을. 설사 이 글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난 추억을 이 자그마한 책 속에 담아 생각날 때마다 읽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만족할 것이다.


눈오는 날이면 눈맞아 좋고, 비오는 날이면 비 맞아 슬픈 감정으로 살고플 때가 있다. 감정에 솔직해지고프기 때문이다. 이 '사연' 이라는 책은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있고, 때론 삶의 활력소가 되는 유머도 있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엿보인다.

괜스레 서문이 길어진 듯 하다. 첫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자질구레한 말들로 책을 덮어 버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책을 만들 수 있게 뒤에서 밀어 주신 홍성숙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해 주신 노찬선배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밤이 꽤 깊었다. 오늘을 둥글게 접어 넣어야 할까 보다. 그래야 내일 잘 펼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