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25년전 아내의 일기장엔 무슨 내용이?

그루터기 나무 2008. 4. 26. 18:07

 

25년전 아내가 쓴 일기 


봉제공장서 일하는 엄마께 도시락 갖다주는 초등2학년 딸

<오늘도 어제처럼 피곤하셔서 (아빠가)쉬셨다. 오늘은 저녁밥을 일찍 먹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조금 보고 나서 7시 30분이 되어 엄마 도시락을 같다 주었다. 엄마 밥을 같다주러 엄마 회사에 가니까 엄마가 나와서 빵을 같다 주셨다. 빵이 참 맛있었다. 엄마는 엄마가 야근하시면 밥을 같다 준다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레서 엄마가 없으시면 언니가 엄마다. 아빠는 집에서 놀으시다가 볼일을 보시러 어디로 가셨다>

 

이 일기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3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제 아내가 쓴 것입니다. 아홉 살 때이지요.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문장구성도 엉성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일기에서는 엄마(장모님)가 도시락을 챙겨주시는 게 아니라 어린 딸(아내)이 공장에 계신 엄마에게 도시락을 갖다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도시락을 갖다 준 것으로 보아 아마 엄마께서 야근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엄마에게 드릴 도시락을 들고 공장을 찾아갔는데 오히려 엄마가 아이(아내)에게 '빵'을 주신 겁니다. 야근할 때는 공장에서 저녁이 나왔던 모양입니다. 저는 바로 '빵'이란 단어에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지금도 처갓집에 가면 수북이 쌓여 있는 '빵' 때문입니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모님은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재봉일을 하고 계시지요. 간식으로 오전에 빵과 우유가 나온다고 합니다. 25년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먹을 것이 많아서인지 500원짜리 빵은 잘 안 드신다고 하더군요.

 

이렇다보니 공장 동료들에게 지급된 빵도 웬만하면 절약정신이 투철한 '손아주머니'(장모님 함자 손복자)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집으로 가져간 빵은 진순이(강아지 이름)이가 즐겨 먹지만요.

 

처갓집에서 자고 오는 날이면 장모님은 꼭 빵을 챙겨주십니다.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해줬는데 출출할 때 빵이라도 먹으라며 몇 개씩 내어주곤 하십니다. 장모님의 사랑을 '빵'에 담아 사위에게 건네시는 마음은 아마도 25년 전 딸들에게 하셨던 마음과 같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내의 초등학교 일기장에서는 '엄마에게 도시락을 갖다 줬다. 빵을 주셨다'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아내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지만 오래된 일기장 속에서 그 당시 '엄마와 딸의 끈끈한 모정'을 직접 확인하니 감회가 새로워집니다.

 

일기장에 '엄마 밥'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엄마 밥'이라는 도시락을 손에 들고 엄마의 직장을 찾아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아이구, 우리 애기 왔어?"하며 어린 딸에게 빵을 내주시는 엄마의 모습을 말이지요. 어쩌면 엄마는 매우 시장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 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시며 아껴뒀던 '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추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좀 애처롭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리 넉넉지 않았던 아내의 어린 시절이 꼬깃꼬깃한 일기장 속에서 묻어 나오기 때문이지요. 지금이라도 좀 넉넉히 생활하시면 '옛 추억쯤'으로 돌리며 장모님과 지난 일들을 재밌게 얘기할 수 있으련만….

 

오늘은 일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어떻게 일기를 쓰는지 모르겠군요. 저희 어렸을 때의 일기내용은 '몇 시에 일어났다. 밥 먹었다. 학교갔다' 뭐 이 정도 내용이었지 않습니까?

 

독자 여러분은 지난날의 일기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은 일기 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옛 일기장을 찾아보십시오.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도 적혀 있을 테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건들이 기록돼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아내의 일기'처럼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면 말입니다.

 

어떤 분은 "다 지난 일기장 들춰서 뭐하나?"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내 또는 남편의 옛 일기장 속의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서 가족간, 부부간의 화목을 더욱 더 다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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