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박건호 씨. 이용의 잊혀진 계절, 조용필 단발머리 등의 가사를 작사한 주인공이다. ⓒ 윤태
오늘은 집안 청소를 하다가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기타를 보게 됐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오래된 기타. 줄이 끊어진 이후 한번도 기타를 쳐본적이 없다. 벌써 수년째 이상태다. 10년전 제대할 쯤 시간이 많이 남아 군에서 배워보긴 했지만 지금은 코드도 다 까 먹었다.
그 기타를 물끄러미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전에 취재때문에 만난 적이 있는 바로 그 사람. 작사가 박건호 씨다. 적어도 기타를 즐겨 치는 사람이라면 박건호 작사가를 잘 알 것이다. 아래 노래 한구절을 보면 그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가수 박인희씨가 부른 가요 '모닥불'이다. 반면 누가 이 노랫말을 지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인공은 바로 작사가 박건호씨(55)이다.
박건호 작사가는 '잊혀진 계절(이용)', '아, 대한민국(정수라)', '단발머리(조용필)',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최진희)' 등 3000여 곡에 달하는 노랫말을 지어 이 시대 최고의 작사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대중가요 보급의 산 증인 박건호 작사가. 당시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정리해본다.
그는 작사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지금까지 모두 10여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 시 등의 문학도를 꿈꾸며 서정주 시인을 찾아가 감수를 받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가요계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본의 아니게 노랫말을 쓰게 됐고, 2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을 벌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한 번 발 들여놓은 가요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가사 주문 때문에 떠밀려 작사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유명세를 타던 74년에는 그가 작곡한 가요 '인어이야기'로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작사상을 받게 됐는데 박건호씨는 "양복이 없어 시상식장에 못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작사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싫어서였다.
방송에서 작사가로 이름이 알려지면 문인으로 활동한다 해도 모두 '작사가 덕' 또는 '작사가이기 때문에'라는 꼬리말이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순수문학을 하고 싶어 했던 그는 작사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문학과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슬펐다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문학에 열정은 조금 식었다. 가요 '잊혀진 계절'이 급부상하던 시기이다. 군부정치 당시 모든 가요 앨범에 '건전가요'를 의무적으로 넣어야 했던 우울한 시절. 박 작사가도 사회정화위원회로부터 주인의식을 함양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화위원회 주도가 아닌 본인 스스로 건전가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 '아, 대한민국'이다. '정부를 위한' 가요가 아닌 '국가를 위한' 건전가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신혼 초 한강변에서 살았던 박 작사가는 한강에 유람선이 떠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고, 그러한 이상이 결국 노래에 옮겨진 것이다. 83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빛을 못 봤지만 이후 KAL기 피격사건, 이산가족 상봉, 서울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을 거치면서 국민적인 화합을 다지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그 전에 이 노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박 작사가는 당시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더욱 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그는 숱한 작사상을 받으면서 영광보다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문학과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신장염 악화로 꺾이는 듯했다. 90년 신장염에 합병증까지 얻은 그는 두 개의 신장이 망가져 삶과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성공적으로 이식 수술을 받고 퇴원하기 전까지 그는 병상에서 시와 산문(투병기)을 썼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생명에 대한 그 절박함을 쓴 시와 산문이야말로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과거 월간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한 그는 앞으로 문학작품 특히 시 분야에 매진할 계획이다. 유명 작사가이기 때문에 그의 시가 뜨는 것은 원치 않는다. 철저하게 작품으로 평가받아야지 이름으로 유명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문학에 대한 그의 기본 철학이다. 본인의 다짐도 그렇지만 방송에 오르내리며 이름을 수단삼아 자신을 알리려는 문인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 글은 월간 '아름다운 사람들'에 실은 내용을 일부 변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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