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얼굴 보여드릴게요.
잠자는 아기의
얼굴이야말로,천사같은,하나님의,얼굴이,아닐까..
고운 나비의 날 개, 비단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가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늘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잠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라.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 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 할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죄도 갖지 않는다.
아무 획책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어서 부르면 웃고 즐긴다. 싫으면 찡그리고, 아프면 울고, 거기에 무슨 꾸밈이 있느냐. 시퍼런 칼을 들고 핍박하여도 맞아서 아프기까지는 방글방글 웃으며 대하는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이 이가 있을 뿐이다.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찬미> 中
소파 방정환 선생은 그의 수필 <어린이 찬미>에서 아기(어린이)의 얼굴을 하느님의 얼굴에 비유했습니다. 아기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며 아기 얼굴에 대한 고귀함과 꾸밈없는 순결함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모를 일이지만 방정환 선생은 이 수필을 쓰기 전에 아기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봤을 것입니다.
천태만상 변하는 아기의 얼굴을 한참동안 관찰하며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방정환 선생이 아기의 얼굴을 왜 하느님에 비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얼굴에 빠져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에서 깨면 배가 고파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에게 엄마 젖이나 젖병을 물려주는 순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뀝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앙앙 우는 아기, 그 벌어진 입에 젖병을 물리는 바로 그 순간의 표정에서 우리는 세상의 온갖 슬픔과 또 세상의 온갖 기쁨의 경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짓도, 꾸밈도, 의도된 바도 전혀 없이 생리적인 반응에 따라 변하는 아기의 표정은 이를 바라보는 사람을 멀리 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기의 웃는 표정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더 큰 즐거움을 줍니다. 웃음의 의미조차 모르고 뱃속에 있던 표정 그대로 배냇짓을 하는 며칠 안 된 신생아. 물론 엄마 아빠는 눈 마주치고 웃었다며 좋아하지만 역시 배냇짓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배냇짓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기가 본능적, 무의식적, 무조건 반사적으로 웃는 것처럼 이러한 웃음을 바라보는 사람들 또한 무조건 웃게 돼 있으니까요. 손으로 두 뼘 남짓한 그 작은 아기의 표정에서 어른들은 순수함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흉악범)일지라도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비록 그 마음이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말이지요. 이처럼 순수한 아가의 얼굴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진 듯 합니다. 아마 사람(흉악범)도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순수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독자 여러분! 오늘은 아기의 얼굴을 한 번 보면서 짜증나는 일, 힘겨웠던 일 모두 하늘위로 던져보세요. 적어도 이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말이지요. 아기의 웃는 표정에 한껏 같이 웃어도 보고, 우는 표정을 보며 “도리도리 까꿍” 하며 달래는 시늉도 해보세요. 아기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면 “나도 한때는 저런 순수한 시절이 있었지”라며 세상에 오염되기 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천사같은...그래서,마음이,더욱,순수해지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