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결혼편지] 우리 처음 만난 날! - 신사동 피자집에서

그루터기 나무 2006. 9. 16. 23:02

 

 

      처음 만난 그때 그 순간, 다이어리를 읽어보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답니다 ⓒ 윤태
 

 

새롬엄마, 령희씨.


2001년 3월 월별 계획이 나와 있는 다이어리를 펼쳐 그 달 14일에 무슨 일이있었나 싶어 살펴봅니다. 정확히 이렇게 쓰여 있군요.


신사에서 김령희 피자 → 신림 → 영등포 : 초콜릿, 우산 건네줌


그렇네요. 지난 2001년 3월 14일 '화이트 데이'인 5년 전 강남구 신사동 피자 가게에서 새롬이 엄마 당신을 처음 만났네요. 서로를 알게 된 지 벌써 5년이나 지났어요.


새롬엄마, 령희씨.


처음 만나던 날 생각나요? 약한 비 내리던 날, 당신도 나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피자였지만 처음 만나는 자리인지라 투박한 밥집보다는 먹을 때도 비교적 우아하게 보이는 한 피자집에 들어갔지요. 두 조각 남은 피자를 서로 가져가라며 양보를 하기도 했지요.


피자 먹고 각자 집에 가면서 나는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당신과 더 있고 싶은 마음에 갈아타는 곳을 깜빡 잊은 척하고 결국 신림역까지 가 같이 버스타고 영등포당신 집 앞까지 데려다 줬지요.


헤어질 때는 딴에는 정성들였지만 사실은 초라한 초콜릿과 함께 우산을 건네주고 배려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던 수줍고 부끄러웠던 그때가 벌써 5년 전 일이에요. 처음 만나 당신이 마음에 들어 어설픈 수작을 벌였던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기도 해요.


새롬엄마, 령희씨.

 

 

아내가 만들어 준 '사랑 볶음밥' ⓒ 윤태

 

 

그런데 참 이상해요. 처음에는 결혼만 하면 세상 다 얻을 것 같고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가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막상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수년 살아보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신혼의 달콤함'과 '설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활의 고단함'과 '평범한 일상'으로 변해 둘 사이에 잦은 다툼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다른 부부들도 대부분 그렇겠지요.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또 한때는 아기가 생기지 않아 무척 걱정하며, 하느님, 부처님 하며 아기 하나만 점지해주시면 바랄 게 없다고 간절했던 적도 있었지요. 임신했을 땐 처음 마음은 아기가 건강하기만 바랐고, 나올 쯤 되니 특별한 성을 은근히 원하게 됐고 이제 걸어 다닐 쯤 되니 그 동안 아기가 보여준 행복의 이면에 숨어 있는 육아, 교육에 대한 부담으로 행복감보단 걱정 쪽으로 저울이 더 기울어지네요. 여느 엄마 아빠 마음도 우리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봐요.


새롬엄마, 령희씨.


종종 내 주변 미혼 남자들이 내게 이렇게 말을 해요. 그 중 한 남성은 결혼해 아기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내게 말을 해요. 나처럼 말이지요. 특히 미니홈피에 올린 우리 가족사진을 보면서 무척 부러워해요. 그래서 두 번이나 아는 여성을 소개해 줬는데, 일이 잘 안 풀리자 “혼자 살아야 할 운명인가보다”하며 크게 낙담하는 모습을 봤어요.


결혼하고 아기 낳고 사는 그 평범한 '소원'들을 이루고 나면 그 행복 이면에 더 큰 어려움과 걱정이 도사릴 수 있다고, 그래서 어쩌면 총각시절이 좋을 수도 있다고 위로를 해주고도 싶었지만 참았어요. 그가 바라는 목표와 행복점이 나와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새롬엄마, 령희씨.


사는 게 다 그런 거 같아요. 당신을처음 만난 순간의 떨림, 신혼의 설렘, 새집에 처음 들어간 첫날 느낌, 아기를 가졌을 때의 기쁨과 낳은 순간의 신비감 등 이런 마음과 감정이 초지일관했다면 온통 행복뿐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것들이 약해지고 흐려지고 무뎌지면서 일상 속에 자연스레 묻히는 거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새롬 엄마, 당신도 느끼고 있지요? 물론 이것이 비단 우리 부부 둘만의 문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요.


새롬 엄마, 령희씨.


사랑을 비롯해 그러한 느낌과 감정이 무뎌지고 생활 속으로 흡수되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 걱정하는 건가요?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고 했지요? 사랑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처음 만난 이성 사이에 2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고 TV,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도 보도가 됐었지요. 나는 그런 생리학적, 과학적 연구결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 호르몬이 멈추면 더욱 끈끈한 정으로 살아가면 되지요. 호르몬이 센지, 정이 센지 한번 겨뤄볼까요? 사랑을 들추는 호르몬의 유효기간이 고작 2년이라면 리어카 타이어보다 더 질긴 정의 유효기간은 20년, 40년, 아니 더 많이 살아갈수록 그 유효기간이 훨씬 더 길어지겠지요. 당신과 나,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있는 동안 유효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들 새롬이, 육아에 대한 걱정도 되지만 그에 앞서 행복감이 가득합니다 ⓒ 윤태

 


새롬이 엄마, 령희씨.


편지를 쓰다 보니 너무 깊은 데 까지 빠져버렸는데요.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요. 우리 처음 만난 5주년 맞아 생활 속에 묻혀 시들어진 마음과 감정이 더 사그라지지 않도록 앞으로 서로를 좀 더 챙기자는 것이에요.


요즘 이사, 금전, 육아, 등의 문제로 티격태격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짜증내고 한 마디 하기 전에 서로를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도 갖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도록 해요. 설령,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우리 아기 새롬이 얼굴 보면서 한발자국씩 물러서고 이해해요.


새롬 엄마, 령희씨.


우리 부부가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듣죠. 아니 어딜 가도 무척 닮았다는 말을 예외 없이 들어요. 처음에는 그냥 하는 얘긴 줄 알았는데, 사진이나 거울을 보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많이 닮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주고 있고요. 부부는 그렇게 닮아가는 것인가 봅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지요. 결혼 전 세상 부럽지 않은 로맨스를 펼치다가 결혼 후 끔찍한 '생활 전쟁'에 기겁하는 사례를 접하고 결혼에 대한 환상을 저버리고 독신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남일 아니죠. 처제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고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 생활 전쟁도 하나의 즐거움으로 생각해요. 살아남기 위한 전쟁,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삶의 전쟁을 치르면서 부부 사이의 정은 더욱 돈독해질 것이고 이 틈새에서 새로운 사랑과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요. 동서고금 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테니까요.


새롬 엄마, 령희씨.

우리 힘내자고요. 그리고 언제나 사랑합니다.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 대한 벽이 두껍다고는 하지만...ⓒ 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