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지하철 안 시각장애인 도와 준 여학생

그루터기 나무 2007. 8. 24. 22:50

 

학생의 도움으로 자리에 앉을수 있었던 그 시각장애인 아주머니 모습 ⓒ 윤태

 

 

요즘 지하철 자리 양보문제가 다음 블로그에서 이슈가 되고 있네요. 저도 지난 겨울 지하철에서 이와 관련한 일을 경험했는데요, 지금부터 얘기해보겠습니다.

 

출·퇴근 길,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에서 종종 마주치는 50대의 한 시각장애인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만 4년을 성남에서 살고 있고 같은 시간대 늘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니 오다가다 아는 얼굴을 마주치기 일쑤고 그 시각장애인 아주머니도 그 중 한 분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잠실역에서 교대방면 2호선으로 갈아타시는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아주머니께서 어느 여학생의 손을 잡고선 남한산성입구역 의자에 앉아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동차가 들어오자 그 여학생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열차에 탔습니다. 열차 안에서도 아주머니와 학생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복정역에서 자리가 나자 학생은 시각장애인 아주머니를 안내해 자리에 앉혀 드렸고 그들 앞에 서 있던 저는 우연찮게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그 여학생이 앞이 안 보이는 아주머니를 도와주려다가 앞 열차를 놓쳤고, 아주머니는 그것에 대해 미안해 하고 계셨습니다. 아주머니는 성남의 한 아파트에 살고 계셨고 이 학생만한 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딸도 시력이 좋지 않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셨습니다.

또 아주머니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구로까지 가신다는 말씀에서 디지털단지에서 일하시는 걸로 미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앞이 안 보이니 휴대전화를 주로 사용해 요금이 많이 나온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던 아찔한 기억도 스스럼없이 꺼내셨습니다. 대화할 상대가 몹시 간절하셨던 듯 일상의 작은 것까지 학생에게 얘기해주셨습니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학생은 내내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주머니의 눈을 쳐다보며 때로는 웃음을 지었고 아주머니의 말에 공감할 때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모녀 사이 같았습니다. 이들의 대화에 저뿐만 아니라 주변 승객들도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잠실역에 다다랐을 쯤 아주머니와 학생은 각자의 소회를 털어놓았습니다. 학생은 혼자서 지하철 타면 심심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오늘은 아주머니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또 아주머니는 늘 외롭게 지하철을 탔는데 학생을 만나 훈훈한 시간을 보냈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거듭 전했습니다.

잠실역에서 아주머니도, 학생도, 저도 내렸습니다. 또 다시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조심하시라며 앞을 안내하는 학생의 모습을 뒤로 하고 저는 2호선 시청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성수까지만 운행하는 열차를 보내고 다음 열차를 탔는데 마침 그 학생이 제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얼굴도 매우 예뻤지만 시각장애인 아주머니를 배려하고 끝까지 챙기는 그 고운 마음이 투시경을 통해 보이듯 비쳐졌습니다.

장애인들에게 일시적으로 도움을 주고 난 후 얼른 제 갈 길을 가는 게 일반적인데 두 손을 꼭 잡고 끝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 여학생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이들의 대화를 듣고 모습을 지켜봤던 주변 승객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뭉클함이랄까.

그리고 다시 한번 장애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내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시각, 지체 장애인들을 향한 은연중의 편견. 이들의 일차적 어려움은 먹고 살아가는 문제겠지만 그 이면에는 '외로운 삶'에 대한 고충이 있습니다. 흔히 장애인들을 처음 볼 때 '안됐다'라고는 생각하지만 '외롭겠다'고까지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먼저 다가가 손잡아 주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은 실정이지요.

또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아주머니의 경우처럼 장애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가정과 일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들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이 훈훈한 일을 겪기 전까지 이 아주머니가 가정과 일을 갖고 계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하철 안 슬픈 음악과 힘겨운 삶을 사는 모습만 우선적으로 떠올렸던 저의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우인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해 준 그 여학생,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이 시각장애우 아주머니를 지하철에서 만나면 먼저 다가가 "아주머니"하고 손을 맞잡고 오늘처럼 다정하게 아주머니를 도와줄 것이란 믿음이 가네요. 그렇지요? 그 학생처럼 지하철에서 선행을 베푸는 아름다운 모습을 또 보고 싶습니다. 아니, 매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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